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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민주장정 100년, 광주·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동학의 교세는 전라도 전체로 확산되었으리라 믿어진다. 더욱 주목되는 점은 고흥의 동학교인들이 금구 원평취회에 참가했다가 보은취회에도 참여했다는 점이다. 위의 자료에 “鄭昌道씨는 포덕 33년(1892] 임진년 3월 2일에 金進化씨에게 교를 받았고, 계사년(1893)에는 本郡의 道人 數十員과 함께 金溝 院坪 龜尾山 아래에 모여 연이어 10여 일을 머물다가 報恩의 長安 모임에 합쳐 珍山에 이르렀는데 선무사 魚允中을 만나는 바람에 내려 왔다”고 기록되어 있는 점으로 보아 그러하다. 이로써 볼 때 원평취회와 보은취회가 각각 독자적으로 개최되었다기보다는 연결선상에서 이해하는 것이 옳을 것 같다. 즉, 이들이 원평에서 10여 일이나 머물다가 보은으로 갔다는 것은 원평에서 먼저 모여 관심사를 의논한 다음 보은으로 갔을 것으로 추측된다. 좀 더 확인해야 되겠지만 고흥의 사례에서는 그러한 정황을 알려준다. 한편, 이들이 1893년 음력 3월 보은취회에 참가하는 상황을 황현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이때 동학인들은 서쪽으로 임피·함열에서부터 동남쪽으로 광양·순천에 이르기까지 모두 소를 팔 고 행장을 꾸려 식량을 준비하고 표주박을 이고 배낭을 짊어지고 기일에 맞추어 도착하느라 도로가 메워졌다. 민간에서는 소동이 일어났고 두려워하는 기색이 역력했으며, 수령들도 두려움에 위축되었 고 군영의 장수들은 아무 말도 못하였다. 이들 중 그 누구도 한마디 명령을 내거나 군사를 출동시켜 감히 이들을 막고 힐문하지 못하였다(황현, 『번역 오하기문』, 66쪽). 전라도의 동에서 서까지 모든 군현에서 수많은 동학교인들이 충북 보은으로 가느라 도로가 메워질 정도였다는 것이다. 심지어 관아와 군영에서조차 이들을 두려워하며 저지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 가운데 순천의 동학교인은 50여 명이 참가했으며, 86) 고흥에서도 정창도 등 수십명이 원평취회와 보은취회에 참여하였다. 1894년 음력 정월, 고부의 농민봉기는 순천에 영향을 주었던 것 같다. 다음의 기록을 통해 그러한 정황을 살필 수 있다. (1894년 음력 2월) 25일 순천부의 백성 수천 명이 동쪽에 모여서 난이 일어날 듯하였다. 부사 金甲圭 가 백성을 향하여 원하는 대로 다 들어주겠다고 애걸하자 백성들은 곧 흩어졌다. 갑규는 민영준의 매 부로서 관직에 오른지 2년 정도되었는데, 백성들을 가혹하게 수탈하는 것이 도리어 민씨들보다 심하 여 계사년(1893-저자주) 가뭄에 백성들은 겨우 원래의 세금이나 납부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봄이 되어 갑규가 백성들에게서 또 세금을 징수하였는데, 토지 매결마다 쌀 일곱 말씩 거두어들였다. 백성들은 도저히 견딜 수 없어 난이 일어날 뻔하였다(황현, 『번역 오하기문』, 71쪽). 86) 『취어』, 『동학란기록』 상, 12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