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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혁명 43 기미가 있으면 즉시 보고하라’는 내용으로 보아 그러하다. 하지만 이러한 공문서가 오고간 시기가 보은취회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나, 보성 동학교인의 참가여부는 잘 알 수 없다. 그렇다 하더라도 보성 동학교인의 움직임은 같은 시기에 있었던 보은취회와 연관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 시기를 전후하여 보성의 동학교인들은 더욱 확산되었을 것으로 믿어진다. 그리하여 무장기포이후 백산대회에 보성의 文章衡 李致義 등이 농민군을 이끌고 참여하였다. 83) 이후 이들이 어떠한 역할을 담당했는지는 거의 알려진 바가 없어 아쉬울 따름이다. 5. 전남 동부지역 동학농민군의 동향 1862년 진주에서 시작된 농민항쟁의 여파는 그 이웃에 해당하는 전남 동부지역에 곧바로 영향을 주었다. 음력 5월 15일 朴命植을 비롯한 3천여 명이 관아에 몰려가 환곡과 結稅, 寃徵 등에 관여한 前現職 吏房들을 살상하고, 그들의 집과 각종 문서를 불살랐을 뿐만 아니라 公錢을 빼앗거나 이속들을 닥치는 대로 구타하였다. 84) 이로 인해 순천부사 徐臣輔는 파직되고 농민항쟁을 주도한 사람들은 엄한 처벌을 받는 것으로 귀결되고 말았다. 한편, 광양에서는 1869년 음력 3월 閔晦行 등 수백명이 변란을 도모한 바 있으며, 1889년에도 이방 白智洪이 광양현감의 탐학에 반발하여 농민봉기를 일으킨 적도 있었다. 따라서 순천과 광양을 비롯한 전남 동부지역도 농민들의 불만이 팽배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동학의 수용은 극히 자연스러웠을 것이다. 1890년 광양의 趙斗桓과 고흥의 宋年燮 등이 각각 동학에 입교하였다. 85) 고흥의 동학 수용과정을 좀더 살펴 볼 수 있다. 敎訓長 丁永詢 씨는 布德 31년(1891) 신묘년에 泰仁에 사는 劉明實에게 교를 받고서 포덕한 것이 많 아 受敎者가 수천인이나 되었다. 갑오년의 온갖 풍상을 겪었고, 지난 갑진년과 을사년 동안에는 聖師 를 따라 지휘하고 여러 교인으로 하여금 옛날 세상의 옛날 사람이 되는 데서 벗어나게 하였다(『高興 郡敎區歷史』, 「本區歷史」, 1917). 1910년대 천도교 교훈장을 지낸 정영순은 1891년 전북 태인의 유명실로부터 동학을 전수받았다는 것이다. 그가 수천명의 고흥 사람들에게 동학을 포교했다는 점으로 보아 고흥지역 동학 수용에 주도적인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위의 자료에 의하면, 그는 1891년 宋年浩에게 동학을 전했으며, 송연호는 같은 해에 宋洪吉 宋柱爀 金宗文 등에게 포교하였다고 한다. 1년 뒤에 金進化는 鄭昌道에게 포교하였고, 朴百年은 1894냔 金昌圭 張景采 등을 입도시켰다는 것이다. 이처럼 1890년대 초반 83) 오지영, 『동학사』, 458쪽. 84) 『壬戌錄』(국사편찬위원회, 1971), 68-69쪽 ; 『龍湖閒錄』 3(국사편찬위원회, 1979), 85-86쪽 ; 『日省錄』 철종 1862년 7 월 2일자 「全羅左道三邑暗行御史金元性進書啓別單」. 85) 『천도교회월보』 252 279(1931년 12월호 1935년 9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