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page

동학혁명 37 수행하였다. 곡성의 동학교인 활동은 1893년 음력 정월의 괘서운동에서 확인된다. 60) 즉, 전봉준이 작성한 倡義文을 각 군현의 衙門에 게시할 때 곡성의 동학교인 金在泓이 괘서했다는 것이다. 당시 남원의 金榮基, 운봉의 金聖基, 구례의 柳泰洪 등의 동학교인들도 괘서운동에 동참하였다. 하지만 창의문의 내용과 괘서운동에 참여했던 지역은 정확하지 않다. 아마도 교조신원운동이나 동학 포교의 자유와 교인의 탄압 중지 등을 주장하는 내용이었을 것이다. 이는, 전라남북도의 접경 지역의 동학조직이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확인해준 점에서 주목된다. 이후 곡성지역 동학교인들의 활동은 백산대회에서 확인된다. 趙錫夏 趙在英 姜日洙 金玄基 등이 농민군을 이끌고 백산대회에 참여한 것이다. 61) 곡성 출신의 조석하 등은 전봉준의 주력군으로 활동했으리라 짐작된다. 이들이 전라우도의 군현에서 활동하고 있을 때 타 지역 농민군들이 옥과현에 들어온 적 있었다. 62) 양력 5월 중순경 농민군 수천 명이 옥과현의 관아를 일시 점령한 후 현감을 무기와 官穀을 징발하여 정읍으로 물러갔다. 한편, 농민군 세력이 전라도 전체로 확산되자 전라병사 이문영은 포군을 징발하여 농민군의 공격에 대비하였다. 음력 4월 20일 곡성에서도 포군 100명을 징발하여 일부를 무안으로 파견하고, 나머지는 곡성을 방어하게 하였다. 63) 그러면 곡성의 동쪽에 위치한 구례의 정황은 어떠했을까. 구례는 동으로 경상남도 하동, 북으로 남원, 남으로 순천과 맞닿아 있었다. 1862년 농민항쟁 당시 구례의 농민들도 약간의 동요가 있었던 것 같으나, 그 구체적인 내용은 알 수 없다. 64) 그 이후 구례는 상당한 변화를 겪은 것으로 보인다. 구례에서 동학이 적극 수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布德 33년 壬辰春(1892)에 곡성군 奇鳳鎭氏의 전도로 許鐸 林良淳 林泰淳 趙慶默 禹公鼎 諸氏가 선 구되야 포덕이 수백호에 달하였다. 동 35년 갑오의 대운동에 민포의 觸忤 로 교인의 가산은 全敗되고 刃銃의 寃魂됨이 백여 인이었다.(남원종리원 편, 『종리원사부동학사』) 앞서 언급했듯이, 1892년 봄 곡성의 동학교인인 기봉진이 구례에 동학을 전도해주었음을 알 수 있다. 기봉진은 허탁 임양순 임태순 조경묵 우공정 등에게 동학을 전해주었으며, 이어 수백호의 구례 사람들이 동학교인이 되었다는 것이다. 최제우는 1861년 음력 6월이후 약 1년간 남원에 기거한 적이 있었다. 즉, 그는 남원의 광한루 아래에서 약방을 하던 徐亨七과 孔昌允의 집에서 수십일 동안 유숙하였다. 65) 이때 그는 서형칠과 60) 위와 같음. 61) 오지영, 『동학사』, 459쪽. 62) 『주한일본공사관기록』 1, 6쪽. 63) 황현, 『번역 오하기문』, 85쪽. 64) 오영교, 「1862년 농민항쟁 연구」, 『손보기박사정년기념 한국사학논총』(지식산업사, 1987), 691쪽. 65) 이하는 남원종리원 편, 「종리원사부동학사」(1924)를 주로 참고하여 정리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