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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혁명 35 입고 각자 긴 창과 큰 칼로 무장하고서 절반은 말을 타고 나머지는 걸어서 나주로 갔다고 한다. 48) 2. 전남 중부지역 동학농민군의 동향 현재의 전라남도에서 광주는 나주와 함께 전략적 요충지이자 사통팔달의 도시이다. 지금으로부터 120년 전에도 광주와 나주는 남도의 중심지 역할을 수행하였다. 다만, 광주에 동학이 수용된 시기는 잘 알 수 없다. 광주의 동학 연관성은 1894년 음력 3월 말의 백산대회부터 나타난다. 朴成東 金祐鉉 등이 농민들을 이끌고 참여하였음 49) 이 확인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 이후 제1차 동학농민혁명 시기에 이들의 행적을 찾을 수 없어 아쉬울 따름이다. 이제 나주로 눈을 돌려보기로 하자. 나주는 榮山江 양편에 나주평야가 자리한 고을로서 특산물이 많이 산출되었다. 하지만 보수적인 유생이 강고한 지역인 탓인지 동학의 수용과 전파과정을 알려주는 자료를 찾을 수 없다. 무장기포이후 吳中文과 全有昌 등이 농민들을 이끌고 백산대회에 참여한 정도가 확인될 뿐이다. 50) 현재의 화순은 조선시대 3개 군현, 즉 화순 동복 능주가 합친 고을이다. 물론 동학농민혁명이 전개될 당시에는 분리되어 있었으나, 생활문화권이 동일한 관계로 여기서는 하나로 통합하여 다루고자 한다. 1862년 농민항쟁 당시 능주와 동복에서도 각각 농민들이 관아를 공격하고 민가를 부순 사건이 발생하였다. 즉 능주에서는 金基石, 동복에서는 李彦忠 등이 樵軍 수백명을 이끌고 활동했으나, 51) 자세한 전말을 알려주는 자료는 찾을 수 없는 실정이다. 그런데 이들의 요구사항은 1894년까지도 해결되지 않았던 것으로 짐작된다. 능주의 文章烈 趙鍾純 등이 백산집회에 참여 52) 한 것으로 보아 그러하다. 즉 대개 그러했듯이 화순의 경우에도 1890년대 초반 동학을 수용하였을 것이고, 그것을 매개삼아 백산대회에 가담하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하지만 그 이후 이들의 활동은 집강소 설치 이전까지 거의 드러나지 않는다. 3. 전남 북부지역 동학농민군의 동향 1894년 동학농민혁명이 발발했을 때 현재의 담양은 담양도호부와 창평현으로 나뉘어 있었다. 현재의 담양군은 동쪽에 곡성, 서쪽에 장성, 북쪽에 전라북도 순창, 남쪽에 화순과 광주와 맞닿아 있다. 즉 담양은 전라남도 북부지역에 해당하는 것이다. 이 글에서는 현행 담양군의 행정구역을 중심으로 서술할 것이다. 그런데 담양지역에 동학이 수용되는 과정을 알려주는 기록은 전혀 찾을 수 없다. 다른 지역과 48) 백창석, 「무안동학농민혁명의 연구」, 『무안동학농민혁명사』(무안동학농민혁명유족회, 2008), 56쪽. 49) 오지영, 앞의 책, 458쪽. 50) 위와 같음. 51) 송근수, 『용호한록』 3, 82쪽. 52) 오지영, 『동학사』, 45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