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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민주장정 100년, 광주·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당시 농민군은 6,000-10,000명, 관군은 300명 규모로 파악되며, 장태의 고안자는 장흥 출신의 이방언, 장성 출신의 이춘영과 최경호, 담양 출신 이용길 등 여러 설이 있다. 고안자도 물론 중요하지만, 농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장태를 활용한 점을 더 중시해야 하지 않을까 한다. 즉, 이들의 대다수가 농민들이기 때문에 전남 지역에 흔한 대나무로 제작한 닭장에서 착안한 사실만 보더라도 농민군의 특징을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누구나 그러한 착상을 할 수 있다는 점에서 고안자가 여러 명으로 거론되는 것이 아닐까 한다. 한편, 장성 황룡싸움에서 경군을 격파한 농민군은 곧바로 전주를 향해 진격하였다. 전봉준 등은 장성 신흥 사거리를 거쳐 갈재 못미쳐 全日貴孝子碑 부근에서 하룻밤을 유숙하였다. 正祖 대의 효자였던 전일귀의 효성에 감동한 전봉준은 효자비에 정성을 다해 치성을 드렸다고 전한다. 아마도 그는 같은 성씨여서 감회가 남다른데다, 동학에서도 효를 중시하여 불효자를 죽이겠노라는 기율을 발표했기 때문에 농민군의 사기를 드높이는 계기로 삼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런 까닭으로 인해 관군이 그 비각과 비석을 파괴하여 현재는 비신의 일부만 전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42) 이곳을 출발한 농민군은 곧장 전주로 직진해서 5월 31일 감영에 입성하였음은 잘 알려진 바와 같다. 그러면 당시 전남 서부 지역에 위치한 무안지역 농민군의 동향은 어떠했을까. 이미 무안현은 1862년 당시에도 농민봉기의 움직임이 있었다. 당시 朴昌應 등이 농민들을 대표하여 무안관아와 전라감영에 진정하였으나, 주모자들은 장형에 처해지거나 감옥에 갇히고는 흐지브지되고 말았다. 43) 그후 시기는 불분명하나 무안 주민들도 동학을 수용한 것 같다. 무안을 비롯한 영암 순천 등 5개 지역에서 260여 명이 보은취회에 참여 44) 한 것으로 보아 그러하다. 음력 4월 3일 무안의 동학교인 80여 명이 해산, 귀가하였다. 45) 이로써 보면 당시 무안의 농민들에게 동학이 상당히 폭넓게 수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아마도 이러한 동학조직을 기반으로 상당수의 무안 동학농민군이 백산에 달려간 것으로 보인다. 당시 배규인 배규찬 등 15명의 동학지도자들이 농민들을 이끌고 참여했던 것으로 보아 그러하다. 46) 백산대회에 참여한 농민군 지도자의 숫자로만 본다면 무안이 압도적으로 많다. 그만큼 무안의 동학조직과 농민 활동이 강력했음을 의미할 것이다. 이들은 전봉준이 이끄는 주력군으로서 영광과 함평을 거쳐 남하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전봉준의 주력군이 장성으로 향하기 직전 함평에서 남하하여 무안을 점령하였다. 이 때가 음력 4월 18일이었는데, 다음날 이들은 나주 공략에 나섰다고 한다. 47) 당시 배규인은 자신의 출신지인 三鄕面 농민군 70-80명 가량을 이끌었다. 이들은 갑옷을 42) 이상식 외, 『전남동학농민혁명사』, 202-203쪽. 43) 『龍湖閒錄』 3(국사편찬위원회, 1971), 82-83쪽. 44) 『취어』, 『동학란기록』 상, 119쪽. 45) 위의 책, 125쪽. 46) 오지영, 앞의 책, 458쪽. 47) 최현식, 『增訂 甲午東學革命史』(신아출판사, 1994), 7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