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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말의병 329 지방 행정기관의 적극적인 협조를 요청하였다. 이를테면 의병활동의 밀고, 군대 주둔 또는 활동시 편의 제공, 군수품의 조달, 우마와 인부의 징발, 주요 도로의 수리, 귀순자 및 유배자의 감시, 전염병의 예방 등등 의병진압시 필요한 제반 사항에 협조할 것을 지시하였다. 그리하여 6월 초순까지 임시한국파견대의 병력배치가 완료되자 7월에는 현지 부대를 중심으로 광주-전남 의병의 진압에 나섰다. 그들은 7월 13일부터 한달 예정으로 11개 종대를 편성하여 군사작전을 전개하였다. 186) 이 과정에서도 상당수의 의병들이 희생되었다. 일제는 대규모 군사작전에 대비하여 현지 상황을 파악하기 위한 소규모의 군사작전을 전개한 것이다. 한편, 일제는 처음에 광주-전남 의병을 전멸시키기 위해 두 가지 방안을 세운 듯하다. 하나는 褓負商을 이용하여 진압하는 방법이고, 187) 다른 하나는 대규모의 군사작전을 감행하는 것이었다. 그들이 보부상을 이용하려는 계획을 적극적으로 추진한 것은 무엇보다 자신들의 피해를 최소화하고 의병측 피해를 극대화시킬 수 있는 이른바 ‘以韓制韓’방식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계획은 성사 직전에 호남지방 보부상들의 반대에 부딪혀 수포로 돌아갔다. 188) 결국, 일제는 대규모 군사력을 동원하여 호남의병의 진압에 나서지 않을 수 없었다. 일제의‘작전’은 전무후무한 대규모의 병력을 투입하여 참혹하기 그지없는 무자비하게 일관되었다. 이에 대하여 일제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남한에 실시하는 대토벌에는 明治 40년 이래 효력이 微少하였던 대토벌 방식을 고쳐 攪拌的 방법 을 쓰기도 하였다. 즉 토벌군을 세분하여 한정된 一局地 안에서 수색을 실행하여 전후좌우로 왕복 을 계속하고, 또 奇兵的 수단을 써서 폭도로 하여금 우리의 행동을 엿볼 틈을 주지 않은 동시에 해 상에서도 수뢰정 경비선 및 소수 부대로써 연안 도서 등으로 도피하는 폭도에 대비하는 등 포위망 을 농밀하게 하여 드디어는 그들이 진퇴양난에 걸려 자멸상태에 빠지도록 하였다. 이 토벌 방법은 의외로 효과 (중략) (1909년) 10월 말에는 폭도의 최대 소굴이었던 섬진강 이서의 지구 전라남북 도는 깨끗하게 청소(『토벌지』, 『자료집』 3, 792-793쪽). 일제는 스스로 ‘작전’의 명칭을 ‘대토벌’이라 하였지만, 실제로는 ‘攪拌的’ 방법에 의해 광주- 전남 의병을 완전히 소멸시켰다는 것이다. 이는, 대규모의 군사작전 이상의 의미가 내포되었음을 의미한다. 즉 ‘대토벌’이 군대를 동원한 수색이나 포위작전을 통한 단순한 진압작전인데 반하여 ‘교반적’ 방법이란 대규모 군대를 일정지역에 투입시켜 마치 소용돌이를 일으키듯 상대를 포위 교란하여 초토화시키는 방법이었던 것이다. 다시 말해 대규모 병력을 투입하여 닥치는 대로 살상을 186) 『편책』, 『독운사』 15, 92쪽. 187) 大韓每日申報 1909년 7월 27일자 「別出奇計」. 188) 위의 신문 1909년 8월 22일자 「호남의 부상 동포를 하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