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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8 민주장정 100년, 광주·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그런데 일제는 다양한 의병대책으로도 전라도 도서지역까지 확산된 의병을 진정시키기에는 역부족이었다. 174) 특히 전라남도는 무정부상태의 상황으로 파악될 정도로 전라도 의병이 강력하였다. 175) 당시 전라도 의병은 반일투쟁을 영속화함으로써 일제의 대한정책을 실패로 돌아가도록 전력을 기울였다. 176) 더욱이 전라도는 비옥한 토지와 良港을 갖추고 있어서 경제적 발전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177) 그렇지만 전라도 의병의 활동으로 인하여 일제의 경제적 침탈이 쉽지 않으므로 가능한 신속하게 의병을 진압해야 했던 것이다. 당시 일제는 ‘영산강 연안은 남조선의 富源’ 178) 이라 인식하고서 그 거점 도시인 목포와 군산에 각각 3천명의 일본인이 이주해와 식민도시를 형성 중이었다. 179) 전라도에 이주한 일본인들은 ‘수많은 박해와 싸우고 수많은 위험을 무릅썼다가 한국인에 의해 살해된 자가 적지 않았다. (중략) 이에 굴하지 않고 침입하여 교묘하게 한인을 회유하고 위협’ 180) 하였다. 전라도에 대한 대대적인 군사작전의 실시 배경에 일제의 경제적 침탈의도가 반영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전라도 주민들은 청일 러일 전쟁시 일본 군대의 용감한 활동을 직접 보지 못했기 때문에 그들을 과소평가한다고 판단하였다. 더욱이 전라도 주민들은 임진왜란 당시에 왜군을 격퇴한 사실에 대한 자부심이 강해서 일제의 침략을 좀처럼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고 보았다. 181) 따라서 일제는 전라도의 산간벽지에서 연해도서에 이르기까지 완전히 유린함으로써 전라도의 모든 주민들로 하여금 “일본군의 용감한 武威에 驚嘆震慄”케 해서 “일본군의 역사적 명예회복과 제국의 威信”을 확보해야 한다고 공언하였다. 광주-전남 의병을 진압하기 위한 일제의 군사작전은 제국주의의 정치 경제적 침략과 수백 년 전의 복수심까지 결합됨으로써 이미 잔학성이 예고된 것이었다. 182) 이에 일제는 전례를 찾아볼 수 없는 강력한 군사작전을 수립하였는데, 그것이 바로 이른바 ‘남한폭도대토벌작전’이다. 이를 위해 한국주차군사령부에서는 전라도를 관할하는 남부수비관구의 모든 병력을 임시한국파견대로 교체 편성해서 ‘작전’에 투입하였다. 183) 임시한국파견대의 보병 2개 연대는 1909년 5월말 부산에 상륙해서 6월 초까지 목포와 군산으로 각각 이동하였고, 184) 그후 이들은 6월 10일까지 전라남도의 군사적 거점을 점령하여 분산 배치되었다. 185) 아울러 한국주차군사령관은 홍순권, 「의병학살의 참상과 ‘남한대토벌’」, 『역사비평』 45(1998년 겨울호). 신주백, 「湖南義兵에 對한 日本 軍 憲兵 警察의 彈壓作戰」, 『歷史敎育』 87(2003). 174) 『편책』, 『독운사』 1, 808쪽 및 『토벌지』, 『자료집』 3, 792쪽. 175) 위의 책, 817쪽. 176) 위의 책, 806쪽. 177) 위의 책, 807쪽. 178) 田口春二郞 편, 『最新 朝鮮一斑』 1(日韓書房, 서울, 1911) ; (경인문화사, 1989), 45쪽. 179) 小松悅次 편, 『新撰 韓國事情』 제1권 제1호(東亞硏究會, 1911) ; (경인문화사, 1989), 271쪽. 180) 위의 책, 271-274쪽. 181) 『토벌지』, 『자료집』 3, 802쪽. 182) 김의환, 앞의 논문, 213쪽. 183) 『편책』, 『독운사』 14, 496-499쪽. 184) 위의 책, 496-497쪽. 185) 위의 책, 703-70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