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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말의병 327 의 설명을 들어보면 당시의 상황은 이러했다.“일본 군인들이 그 부상병들에게 접근해 왔을 때 그 들은 상처의 고통이 심하여 말도 못하고 다만 짐승들처럼 ‘만세, 만세, 만세!’하고 신음하듯 소리 를 질렀답니다. 그들은 무기도 없었으며, 피는 땅 위에 낭자히 흐르고 있었습니다. 일본군들은 그 들의 비명소리를 듣고 달려와서 그들이 죽을 때까지 칼로 찌르고, 찌르고, 또 찔렀답니다. 그들은 일본군의 칼 아래 갈기갈기 찢기었습니다. 우리는 그들의 시신을 거두어 묻어주었습니다.”일본군 의 만행이 얼마나 지긋지긋했던가를 설명하던 주민들의 진지한 표정은 어느 名文보다도 더 웅변 적이었다. 이것이 단 한 번의 예에 그쳤다면 여기에서 이토록 언급할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 나 내가 도처에서 들은 바에 의하면 일본군들은 지방의 수많은 전투에서 전 부상병들과 그들이 포 위한 의병들을 조직적으로 몰살했음을 알 수가 있었다(F. A. Mckenzie, 신복룡 역, 『대한제국의 비극』, 244). 호남창의회맹소의 기삼연 의병장은 물론이거니와 황해도에서 활동하다가 체포된 의병장 河相泰 禹東鮮 등도 도주를 기도하였다는 명분 등으로 학살당하였다. 169) 또한 일제는 의병에 관한 정보를 얻기 위하여 의병들을 혹독하게 고문하다가 죽이기도 하였다. 170) 이상과 같이 일제의 군경들이 진압과정에서 저지른 만행은 헤아리기 어려울 만큼 많았다. 그들의 잔악행위로 말미암아 오히려 의병 투신자가 증가할 정도였던 것이다. 3. 일제의 ‘남한폭도대토벌작전’의 전개와 결과 광주-전남 의병은 1908∼9년 사이에 전국에서 가장 활발하게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일제는 다양한 방법을 동원하여 이들의 진압에 나섰으나 큰 효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일제는 광주- 전남 의병을 초토화하기 위해 ‘南韓暴徒大討伐作戰(이하 ‘작전’)’ 171) 을 전개하였다. 여기에서의 ‘남한’은 한반도 중부이남 지역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주로 전라남도 지역을 의미한다. 일제의 대규모 군사작전이 유독 광주-전남지역에서 전개된 배경과 진압과정, 그리고 결과 등이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이와 관련하여 『南韓暴徒大討伐記念寫眞帖』이라는 자료집이 특히 주목된다. 172) 이 사진첩은 일제가 광주-전남 의병의 진압을 기념하기 위하여 1910년 도쿄에서 발간한 것이다. 이 밖에도 ‘작전’에 관한 상당량의 문헌이 현재까지 전해진다. 이것만 보더라도 일제가 광주-전남 의병의 진압에 얼마나 적극적이었는가를 알 수 있다. 173) 169) 『편책』, 『독운사』 10, 525-527쪽 같은 책 15, 151-153쪽 참조. 170) 『편책』, 『독운사』 14, 166-167쪽. 171) 이 용어는 흔히 ‘남한대토벌작전’이라 약칭되기도 하나, 일제가 부여한 정식 명칭은 ‘남한폭도대토벌작전’이다. 172) 이 사진첩은 임시한국파견대의 이름으로 1910년 4월 東京에서 인쇄되었는데, 故 金義煥 교수가 일본 오사카 고서점 에서 구입해서 일반에 공개하였으며, 『民族文化論叢』 제8집(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1987)에 재수록되었다. 173) 일제측의 대표적인 의병관련 문헌인 『편책』 『편집자료』 『토벌지』 『폭도사』와 『통감부문서』 등에는 ‘남한폭도대 토벌작전’과 관련된 상당한 분량의 자료가 수록되어 있다. 한편, ‘남한폭도대토벌작전’을 구체적으로 다룬 대표적 인 연구는 다음과 같다. 金義煥, 「1909年의 항일의병부대의 항전」, 『민족문화논총』 8(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1987). 金炅春, 「己酉年 日帝의 南韓義兵大掃討作戰」, 『素軒南都泳博士古稀紀念 歷史學論叢』(민족문화사, 19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