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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말의병 325 그리고 일정한 지역에서 활동하는 의병이나 특정 의병부대를 진압할 목적으로 단기적인 군사작전을 실시하였다. 후기의병의 중심지였던 전남지역에서는 1908년 1월 하순 광주수비대가 11개 부대를 편성하여 의병의 진압에 나섰다. 이 같은 일제의 진압작전은 수시로 실시되었다. 아울러 일제는 유명한 의병장의 소재지나 의병부대의 근거지를 찾기 위하여 變裝隊나 變裝偵察隊를 운용하기도 하였다. 1908년 4월과 1909년 6월에 조직된 각각의 변장대는 전남에서 활동하는 유명한 의병장의 소재지의 파악에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 161) 특히, 1909년 6월부터 3개월 예정으로 운용된 변장정찰대는 14∼5명으로 편성되었는데, 일본군경 토벌대와 수시로 연락을 취하면서 의병이 발견되면 즉각 진압에 나섰다. 162) 일제는 변장대의 활동을 언론에 보도하지 못하게 통제함으로써 163) 의병의 피해가 더욱 커졌으리라 짐작된다. 끝으로, 연안과 도서지역의 의병을 진압하기 위해 전남에 전담 경비선 10척을 배치하였다. 164) 통감의 직접 결정에 의해 1909년 9월에 목포와 여수에 각각 5척씩 배치하였는데, 경비선에는 속사포까지 장착되어 있었다. 일제는 이러한 경비선을 출동시켜 도서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의병들을 진압하였다. 165) 한편, 일제는 1909년 전반에 타 지역에 배치된 병력을 전라남도에 집중적으로 이동시켰다. 이로써 전라남도에는 일제의 진압병력이 크게 증가하였다. 예를 들면, 1909년 5∼6월에 경기 충남북 평양에 주재한 헌병보조원들이 전남에 파견되었으며, 이에 따라 전남 지역에는 헌병파출소가 증설되었다. 166) 이처럼 집중 배치된 병력에 의해 1909년의 의병항쟁을 주도하던 이 지역의 의병들을 진압한 것이다. 하지만 일제의 의병 진압활동에 만족하지 못한 일본인들은 자체적으로 무장하여 의병에 대비하는 경우도 있었다. 167) 한편, 의병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일제의 만행이 적지 않았다. 일제 군경의 非行을 이해하는 데에는 익히 잘 알려진 F. A. Mckenzie의 목격담이 크게 참고된다. ① 내가 서울을 떠나기 직전에, 이또오 공작과 아주 가까운 사이인 모 일본요인이 내게 말하기를, ‘이 사람들(한국인)에겐 일본이 어떤 나라인지를 한 번 맛 좀 보여주어야 하겠습니다’고 한 일이 있었다. ② 한 지방에서 적어도 가옥에 불을 지른 이 방침은 하나의 번창한 사회를 파멸시켜 버림으로써 의병세력을 증가시켰고, 아주 무서운 증오심을 심어줌으로써 이를 제거하려면 수 세대가 걸릴 지 161) 『폭도사』, 43쪽 및 『편책』, 『독운사』 10, 242쪽과 『편책』, 같은 책 14, 581-584쪽. 162) 위와 같음. 163) 『편책』, 『독운사』 10, 256-257쪽. 164) 『편책』, 『독운사』 1, 870-873쪽 및 『편책』, 『독운사』 15, 173-175쪽 참조. 165) 大韓每日申報 1909년 9월8일자와 大韓民報 1909년 7월4일자. 166) 『편책』, 『독운사』 14, 405-407쪽. 167) 위의 책, 126-12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