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6page

324 민주장정 100년, 광주·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통감부의 이토오(伊藤博文)와 조선주차군 사령관 하세가와(長谷川好道) 등과 협의하였음이 주목된다. 150) 1908년 말에 주차군사령관 하세가와는 일본 군대를 동원하여 의병을 진압하겠다고 공언하였다. 151) 다시 말해 의병을 학살하기 위하여 대대적인 군사작전에 돌입하리라는 사실을 공식화한 것이다. 일제가 의병을 무력으로 진압하기 위해 일제는 먼저 군대와 헌병 및 경찰력을 계속 증강시켰다. 예를 들면, 군대의 경우 이미 조선에 배치된 2개 사단 외에도 1908년 5월에 2개 연대 1,600명을 증파하였으며, 152) 1909년 6∼7월에도 여단 규모의 임시한국파견대(사령관 渡邊水哉)가 증강 배치되었다. 153) 또한 1907년 10월에는 제14헌병대를 한국주차헌병대(明石元二郞 소장)로 개편하고, 1908년 7∼9월 사이에 한국인 부랑자 4,065명을 헌병보조원으로 채용함으로써 2,400명이었던 규모를 약 6,500명으로 증강시켜 의병진압에 투입하였다. 154) 이 밖에도 1907년 6월 현재 일본인 경찰병력이 1천여 명을 상회하였다. 155) 이와 같이 일제는 군사력과 헌병대, 그리고 경찰병력을 대폭 증강시켜 의병의 무력진압에 나선 것이다. 다음으로 일제의 통감부를 비롯한 지배기구는 밀정이나 정탐을 고용하거나, 정찰대를 조직하여 의병장의 행적, 의병의 소재지와 규모, 보유 무기 등과 같은 의병과 관련된 구체적인 동향이나 정보를 수집하였다. 일제는 전 해산군인이나 전 의병 출신자들을 밀정이나 탐정으로 고용하였으며, 1908년 7월 현재 전국에 파견된 정탐원이 800명이나 되었다. 156) 일본군 사령부와 헌병사령부에서는 이들을 감독하기 위한 규정과 정탐교환회를 개최하기도 하였다. 157) 한편, 이들에 대하여 대한매일신보에서는 “제 살을 베어 제 배를 채우는 자” 158) 라며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이들이 일본 군경의 앞잡이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또한 일제는 특설순사대를 편성하여 의병항쟁이 치열한 지역의 의병 진압과 정찰 활동 등에 투입시켰다. 159) 특설순사대는 3개 부대가 조직되었는데, 제1순사대는 강원·경상도, 제2순사대는 전남, 제3순사대는 함경도 지역을 담당하였다. 160) 1개 부대당 규모는 총 61명으로, 3개 분대로 편성되었다. 전라남도에 투입된 제2순사대는 1908년 2월부터 10월까지 활동하였다. 이들의 지휘관은 警視 權重彬이었고, 3개 분대장은 전현직 정위 내지 참위 중에서, 그리고 순사대의 일반구성원은 해산군인 중에서 주로 선발하였다. 150) 皇城新聞 1908년 5월 28일자 「義徒鎭壓協議」와 『大韓每日申報』 5월 29일자 「鎭義協議」. 151) 大韓每日申報 1908년 11월 28일자 「長谷川의 韓國談」. 152) 위의 신문 1908년 5월16일자 「繼續出兵」. 153) 위의 신문, 1909년 6월3일자 「派遣隊上陸」 및 『편책』, 『독운사』 15, 367-373쪽 참조. 154) 大韓每日申報 1907년 10월6일자 「憲兵增派」 및 共立新報 1908년 7월11일자 「헌병모집령」 155) 萬歲報 1907년 6월2일자 「警務顧問漸多」. 156) 大韓每日申報 1908년 2월 22일자 「義擾偵探」 7월 11일자 「팔 명졍탐」 10월 2일자 「前義後探」 참조. 157) 大韓每日申報 1908년 4월21 22일자 「偵探規則」 「졍탐회의」. 158) 위의 신문, 1908년 3월 13일자 「졍탐군의 다수」. 159) 『제2巡査隊에 관한 編冊』, 內部 警務局 편(국사편찬위원회 소장, 1908). 160) 위와 같음 및 『殉難者名簿』(국가기록원, 경무 88-15, 1908-19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