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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2 민주장정 100년, 광주·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천명하였다. 136) 그리하여 자위단장을 맡은 면장은 낮에는 숨어 지내고, 밤에도 피난해야 하는 신세를 면하지 못하였다. 당시 면장을 비롯한 동장이나 구장 등은 자의건 타의건 면단위 자위단의 조직을 주도할 수밖에 없었다. 이들 가운데 일부는 일진회와 관련된 인물들도 적지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자위단과 관련된 면장이나 구장 등은 의병의 처단대상이 되었다. 면장이 살해되는 경우도 이 시기에 집중적으로 나타난다. 예컨대, 전남지역에서는 1908년 1-2월 사이, 그러니까 자위단이 조직되던 무렵에 3명의 면장들이 의병에게 총살되거나 습격받았다. 137) 그중 면장 1명은 자위단의 주된 임무의 하나인 호구조사를 하다가 총살되었다. 1908년 10월에 전남 능주에서는 자위단장이 의병에 피살되었고, 138) 일부 지역에서는 의병들이 자위단이 만든 감시초소를 소각한 후 단원을 구타하고 붙잡아 가기도 하였다. 139) 이처럼 자위단과 관련하여 피살된 면장을 비롯한 자위단 관련 인물들이 전국에 걸쳐 적지 않았으며, 자위단 시설의 파괴도 많았으리라 추정된다. 한편, 의병들에게 피살된 일진회원이 9,260명이나 되었다. 140) 이들은 대체로 자위단과 관련된 활동에 종사하다가 살해되었으리라 믿어진다. 이로써 볼때, 자위단을 조직하여 의병을 근절시키려는 일제의 의도는 크게 빗나가고 말았다. 자위단이 의병을 막아낸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위단을 처단하는 의병항쟁이 더욱 고조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1908년 후반에 이르러 자위단은 거의 유명무실한 단체로 전락하고 말았다. 다시 말해서 자위단을 조직하여 의병을 진정시켜려던 일제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이는, 당시 한국인들이 전개한 반일활동이 그만큼 거세었음을 의미한다고 하겠다. 그리하여 일제는 의병을 진압하기 위해 자국의 대규모 군대를 동원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2. 일제의 强穩 彈壓策 19세기말 전기의병이 일어나자 의병을 진압하는 주체는 조선 정부였다. 당시 일본군이 직접 의병의 진압에 나선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141)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일본군이 의병진압의 주체로 등장하였다. 일제가 의병진압의 주도권을 행사하는 문제는 대한제국의 식민지화를 추진하는 과정과 맞물려 있었다. 즉, 일본 閣議는 1904년 5월말에 「제국의 대한방침」과 「대한시설강령」 등을 채택함으로써 군사적 방법에 의한 한국의 식민지화를 본격화하였다. 142) 이에 따라 일제는 식민화를 136) 『편책』(국가기록원 소장, 警務 88-5, 1907), 1287-1290쪽. 137) 『폭도사』, 88-90쪽. 138) 『大韓每日申報』 1908년 10월 24일자 「團長被殺」과 『폭도사』, 67쪽. 139) 『편책』, 『독운사』 8, 514-515쪽. 140) 한편, 일진회에서 간행한 자료에서는 1907년 9월부터 1년동안 살해당한 회원이 966명이라 하였다(「한국일진회지」, 『조선통치사료』 4, 746쪽). 당시 신문에 보도된 내용과는 너무 차이가 있으나 그 차이가 어떻게 생겼는지는 잘 알 수 없다. 1907년 7-8월에 8천여 명이 살해되었는데, 신문에 보도된 약 8천여 명은 일진회원이 아니라 단순히 자위 단원인지 아니면 어느 편의 자료가 잘못된 것인지 확실하지가 않다. 141) 李求鎔, 「韓末義兵抗爭에 대한 考察--義兵鎭壓의 段階的 收拾對策--」, 『國史館論叢』 23(1991), 200쪽. 142) 鄭昌烈, 「露日戰爭에 대한 韓國人의 對應」, 『露日戰爭前後 日本의 韓國侵略』(일조각, 1986), 210-21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