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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0 민주장정 100년, 광주·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시행하는 기관이라 할 수 있다. 局長 松井茂를 비롯한 고위경찰간부는 대부분 일본인이었고, 한국인들은 그 지시를 따르는 순사나 순사보조원으로 대부분 활동하였다. 또한 경무국은 귀순과 관련된 제반 문제를 통감부와 헌병대, 남부와 북부의 수비관구 등 일제의 지배기구와 긴밀히 협의하였다. 따라서 귀순정책은 일제에 의해 실질적으로 주도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이제 전라남도에서 활동하다가 귀순한 의병에 대하여 좀더 구체적으로 알아보면 아래와 같다. 129) 『全南暴徒史』에는 1908년 2월부터 10월 사이에 전남경찰부 관할서에 歸順한 의병 116명에 대한 인적 사항, 즉 출신지역·나이·직업 등이 기록되어 있다. 이들을 출신 지역별로 통계를 내면 다음과 같다. <표> 1908년 2∼8월 귀순한 광주-전남의병의 지역별 분포 /군별 함평 나주 장성 광주 구례 영광 곡성 장흥 창평 기타 名(116) 27 25 18 11 8 7 6 6 3 5 %(100) 23.3 21.5 15.5 9.5 6.9 6.0 5.2 5.2 2.6 4.3 위의 표에 나타나 있듯이, 전체 귀순자 가운데 69.7%가 咸平 羅州 長城 光州 등 4개 郡 출신들이다. 귀순자의 발생 수치가 높은 지역이 곧 의병활동의 중심지라고 할 수는 없을지라도 어느 정도 그것을 반영한다고 생각한다. 일제측 자료에서도 光州 長城 羅州 潭陽 등지가 의병이 盛한 지역이라고 파악한 점130)에서 그러하다. 또한 이들의 연령은 대체로 20∼30대가 많았으며, 직업의 경우에 전라도의 지역적 특성을 반영하듯이 약 90%정도가 농업이었고, 상업은 약 9% 정도였다.131) 이와 같이 상당수의 의병들이 의진을 이탈하여 귀순함으로써 당시의 의병항쟁은 상당한 타격을 입었으리라 짐작된다. 한편, 일제는 귀순한 의병들의 동향을 지속적으로 파악하면서 이들이 의병에 다시 가담하는지의 여부를 지속적으로 감시하였다. 이미 「歸順者條例」에 이들에 대한 감시기간이 4∼6개월로 명시되어 있다. 132) 경찰서에서는 洞長으로 하여금 매일 1회씩 감시하되 귀순자의 행동을 경찰관에게 보고케 하였다. 그리하여 각 경찰서에서는 귀순자 상황을 道警察部로 보고하고, 경찰부에서는 경찰서의 보고내용을 수합하여 경무국으로 다시 올렸다. 보고 사항에는 귀순자 現在數와 6개월전 현재수, 正業에 종사한 자, 正業에 종사하지 않은 자, 도주한 자, 의병에 재가담한 자 등이 포함되었다. 예컨대, 1909년 4월 현재 강원도의 귀순자 현재수는 2,000명인데, 6개월 전에는 2,017명이었다. 133) 129) 『暴徒史』, 146-152쪽. 130) ) 『편책』, 『獨運史』 13, 483쪽. 131) ) 홍영기, 「舊韓末 全羅南道 島嶼地方 義兵에 대한 一考察」, 『東亞硏究』 21(1990), 19쪽의 각주 1 참조. 132) 皇城新聞 1907년 12월 21일자 「歸順者의 對 警務」 참조. 133) 『편책』, 『독운사』 14, 29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