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page

30 민주장정 100년, 광주·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다(『주한일본공사관기록』 1, 14쪽). 영광에서 활동하는 농민군의 규모와 복병의 배치, 부대의 편성 규모, 연락방법 등을 보여주는데, 제법 정연한 편제를 이루었음을 알 수 있다. 농민군의 심상치 않은 활동을 파악한 정부는 捕盜廳 장교를 파견했는데, 그는 다음과 같이 정탐 내용을 보고하였다. 영광에 둔취한 동학도들은 매일 陣法을 조련하고 밤에는 經文을 송독하는데, 5-6천명 가량씩이고, 영광 무장 등지에 가장 많다. 영광 일대를 휩쓴 동학농민군의 기세는 대단했다(『주한일본공사관기 록』 1, 19쪽). 위의 인용문에서 경문을 외는 것으로 보아 이들은 대부분 동학교인을 표방하였으며, 진법훈련을 통해 군사적 역량을 강화하는 과정임을 알 수 있다. 주로 영광과 무장에 주둔하며 활동중이었는데, 특히 영광의 농민군의 기세가 대단하는 것이다. 이들은 영광에서 4일간 주둔하며 인근 고을에 동참을 호소하는 통문을 보내며 전열을 강화해갔다. 이들이 비교적 장기간 영광에 주둔한 배경은 보은취회이후 영광의 동학 조직이 탄탄하게 자리를 잡았고, 인접 고을인 무장과 함평의 동학조직과 연락이 편리한 때문이었다. 또한 조창을 거느린 법성포에서 군량을 쉽게 조달할 수 있는 등 여러 가지로 유리한 배경으로 작용하였을 것이다. 음력 4월 16일 농민군의 2/3병력인 6-7천명은 함평으로 진군하고 나머지 농민군은 영광에 잔류하였다. 당시 함평으로 출진하는 이들이 “깃대를 세우고 창을 들고 칼을 휘두르며 총을 쏘았으며, 말을 탄 자가 100명이나 되었고 그중에는 갑옷을 입고 전립을 쓴 자도 있었다”고 한다. 한편, 영광의 농민군 활동 소식은 시시각각 인접지역인 함평에 전해졌다. 1862년 농민항쟁 당시 농민지도자 鄭翰淳 등의 활동과 희생으로 일부 폐막을 시정한 바 있었다. 한달 동안이나 지속된 함평농민항쟁은 수천명의 다양한 계층이 적극 참여한 사건이었으나, 조정에서는 주모자였던 정한순 등 6명을 효수하고 10여 명을 엄한 형벌로 다스리고 유배보내었다. 輔國爲民을 내세웠던 정한순은 단순한 민란을 넘어서 보다 발전적 형태의 무장봉기로서 조직력과 규모, 투쟁방법 면에서 다른 사례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였다. 따라서 함평 농민들은 상당한 피해를 입었지만, 무장기포 이후 새로운 세상의 기운을 느끼고 있었다. 함평에 동학이 수용된 시기는 잘 알 수 없으나, 보은취회에 참여한 것이 확인 39) 되므로 그 이전임은 분명하다. 하지만 함평 동학교인의 백산 참여 여부는 불확실하다. 어쩌면 1862년 함평농민항쟁의 피해가 컸기 때문에 무장기포 이후의 동향에 애써 신중했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4월 16일 아침 39) 『취어』, 『동학란기록』 상, 11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