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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6 민주장정 100년, 광주·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의병들을 강제로 동원하여 도로공사를 하게 된 배경과 과정을 알아보았다. 1. 정부 및 일제의 의병탄압 (1) 정부의 의병 대책 1895년을 전후한 시기부터 일어난 의병들은 일본의 침략행위를 격렬히 성토하는 한편 개화정책에 대하여 적극 반대했다. 정부에서는 이들을 진압하기 위한 방안에 고심하였다. 당시 의병의 주체가 재야 유생이라는 점에 주목한 정부는 국왕의 이름을 내세워 의병의 해산을 명령하는 詔勅을 공표하고 宣諭使를 파견하였다. 재야 유생들의 勤王意識을 자극하여 정부에 저항하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정부는 의병활동이 가장 거세었던 강원도에 內務協辦 劉世南을 최초로 선유사에 임명하여 파견하였다. 또한 재야 유생들에게 신망이 높았던 申箕善과 李道宰를 각각 南路宣諭使와 東路宣諭使에 임명하여 각각 호서·호남지역과 영동·영남 지역에 파송하였다. 이들은 의병들에게 의진을 해산하고 생업에 돌아갈 것을 종용하였다. 108) 이 가운데 신기선은 1896년 3월초부터 5월 중순까지 2달 여 동안 선유활동을 펼쳤다. 109) 이후 정부는 1909년까지 7∼8회에 걸쳐 해산조칙을 발표하고 고관들을 선유사나 선유위원으로 파견하여 의병을 진정시키고자 노력하였다. 전기의병 당시 선유사의 해산지시에 불응한 경우에는 親衛隊와 鎭衛隊 병력을 동원하여 강제로 해산하였다. 또한 개화파 관리를 처단한 의병부대의 경우에는 그 주모자들을 처벌하였다. 대표적인 사례로서 나주의병을 들 수 있다. 나주의병의 주도 인물인 鄭錫珍 金蒼均 丁相燮 등은 진위대에 의해 처형되었다. 이들이 개화파로 유명한 安宗洙 등을 처단했기 때문일 것이다. 한편, 일부의 반발이 없지 않았지만 대부분의 재야 유생출신의 의병 지도부는 선유사의 해산지시를 수용하였다. “위로부터 宣諭를 내려 의병들을 타이르자 부득이 군사를 罷하였다” 110) 는 글로써 그러한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그후 중기의병이 일어나자, 정부는 지방관들로 하여금 해당 지역의 선유활동에 나서게 하였다. 이를테면, 1906년 5월에 충남 홍주군수 尹始永과 경북 靑松郡守 安鍾悳 등이 그들이다. 111) 1907년 8월 이후 후기의병이 크게 확산되자, 정부는 다시 선유사를 파견하였다. 경기도 선유사 鄭寅興 등 5道에 파견된 이들은 과거와 마찬가지로 의병의 해산을 권유하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당시 전라남도의 경우에는 관찰사가 선유사를 겸임하였다. 112) 이들은 각 郡을 순행하며 선유한 결과를 內部에 보고하였는데, 일병 30명의 호위를 받으며 활동한 관계로 선유사가 아니라 討捕使나 다름없다는 비판을 받았다. 113) 그해 9월에도 純宗은 거듭 조칙을 내려 의병의 해산을 지시하였으며, 108) 『舊韓國官報』 1896년 2월18·27일자 號外 「勅諭」. 109) 신기선, 『申箕善全集』 下, 「奉使日記」(아세아문화사, 1981). 110) 『湖南義兵將列傳』, 『자료집』 2, 631쪽. 111) 이구용, 앞의 논문, 190-191쪽 참조. 112) 皇城新聞 1907년 8월29일자 「送宣諭使書」. 113) 위와 같음 그리고 大韓每日申報 1907년 11월5일자 「光察諭還」과 같은 8월30일자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