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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말의병 313 기록으로 보아 그러하다. 이들은 출신지를 의병활동의 주된 근거지로 삼아 주민들을 괴롭히는 가짜 의병과 부호의 토색, 관리의 가렴주구 등을 해결해주었으며, 주민들은 의병들에게 숙식과 정보를 제공해주었다. 때로는 주민들이 스스로 전투에도 가담하여 일본세력의 구축에 힘을 보태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호남지방의 후기의병은 장기항전의 기반을 마련하게 된 것이다. 마지막으로 광주-전남 의병은 1907년경 장기항전에 대비하여 국내에 영구적인 의병기지의 건설을 추진하였다. 이들은 智異山과 島嶼 지역을 의병의 기지로 주목하였다. 이는, 중부이북의 의병들이 이른바 北計策을 추진한 것과 비교된다. 96) 그런데 지리산을 장기항전의 근거지로 삼으려는 시도는 1907년 중반이후에 추진되었다. 이러한 전략을 본격적으로 추진한 의병장은 바로 高光洵이었다. 고광순은 약 10년 동안 오로지 국권을 수호하기 위해 항일투쟁을 전개했으나, 사실 그 결과는 참담할 정도였다. 그는 새로운 투쟁전략의 필요성을 느꼈으리라 믿어진다. 그러한 고심의 흔적을 앞서의 인용문에서 “兵書를 더 耽讀하기에 寢食까지도 잊어버리고 뜬눈으로 날을 새우”기도 했다는 것이다. 이때 그는 즉각적인 무장투쟁보다는 장기항전을 모색하기 위한 투쟁전략을 찾기 위해 노력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면 그의 지리산을 무대로 한 장기항전 전략은 언제부터 논의되었을까. 아마도 최익현과 임병찬이 주도한 태인의병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처음 제기된 것으로 짐작된다. 1906년 음력 2월에 임병찬이 최익현에게 보낸 편지에서 “곳곳에 심복들을 집결시킨 연후에 頭流山에 웅거하여 進攻退守之計로 삼아야 한다” 97) 고 주장한 것으로 보아 그러하다. ‘진공퇴수지계’는 의병이 강할 때는 나아가 적을 치고 의병이 약해지면 깊은 산에 들어가 무력을 기르는 전술을 의미한다. 98) 그러나 최익현은 두류산, 즉 지리산에서의 장기항전 전략보다는 의병을 일으켜 북상해서 일제와 외교적 담판을 통해 그들을 물리치려는 전략을 택하였다. 99) 요컨대 지리산을 무대로 한 장기항전 전략은 1906년 음력 2월 태인의병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임병찬이 제안한 것이었다.· 그 후에도 의병의 지리산 웅거책은 지속적으로 제기되었다. 1907년 2월 남원에서 봉기한 양한규 역시 그러한 계획을 제시하였다. 100) 양한규와 고광순은 연합하여 활동할 계획이었으므로 지리산 웅거책에 대하여 서로 의논한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이후 고광순은 장성의 기삼연, 화순의 양회일과 더불어 掎 角之勢를 형성하여 동시다발적인 봉기를 계획했으나 양회일의 쌍산의소만이 1907년 4월에 거병하였다. 101) 쌍산의소의 결성과정에서 중군장 林昌模는 智異山練兵說을 96) 柳麟錫, 「與諸陣別紙」, 『毅菴集』 上, 592쪽.·한편, 유인석의 북계책과 관련된 주요 연구성과는 다음과 같다. 姜 在彦, 「朝鮮獨立運動の根據地問題」, 『朝鮮民族運動史硏究』 1, 1984, 東京 ; 『朝鮮の儒敎と近代』, 姜在彦著作選 Ⅰ (東京, 明石書店, 1996). 柳漢喆, 「柳麟錫의 義兵根據地論--1907年 以後를 中心으로--」, 『한국독립운동사연구』 8(1994). 97) 林炳瓚, 「答勉庵先生書」(1906.2.9), 『義兵抗爭日記』(한국인문과학원, 1986), 60쪽. 98) 홍영기, 『대한제국기 호남의병 연구』, 184쪽. 99) 위의 책, 177쪽. 100) 황현, 『매천야록』, 406쪽 및 대한매일신보 1907년 8월 21일자 「디방졍형」. 101) 홍영기, 『대한제국기 호남의병 연구』, 210~212쪽. 한편 1907년 4월 고광순 의진이 능주와 화순 점령 등의 의병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