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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0 민주장정 100년, 광주·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태인 출신들도 많은 편인데, 이는 유력 의병장들의 지역적 기반과 관계된 것으로 보인다. 태인의 임병찬, 순창의 최산흥 양윤숙, 임실의 이석용 의병장 등이 그들이다. 한편, 타 지역 출신들이 호남지방에서 활동하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은데, 의병장으로는 김동신이 대표적인 인물에 해당된다. 이로써 볼 때 광주-전남 의병은 대체로 출신지역을 기반으로 의병투쟁을 전개했다고 말할 수 있다. 의병활동을 전개하다가 사망이나 체포 또는 자수한 의병들이 상당히 많다. 전기·중기 의병 시기에는 체포된 의병들이 유배되었다가 赦免받는 경우가 비교적 많았다. 그러나 후기의병 시기에는 대부분 體刑을 받았다. 특히, 주도인물들은 대부분 사형당한 사례가 많았으며, 10년 이상의 重刑으로 처벌된 의병들도 상당수였다. 또한 전투중에 사망하거나 체포된 경우도 후기의병 시기에 집중적으로 발생하였다. 이 점만 보더라도 전기·중기 의병에 비해 후기의병 시기에 의병항쟁이 거세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歸順者는 1908년에, 자수자는 1909년에 집중되었음을 알 수 있다. 前者가 일제의 귀순정책의 시행과. 그리고 後者는 ‘작전’의 실시와 관련되었기 때문이다. 이제 義陣을 조직하면서 의병의 모집과 충원을 어떻게 하였는지 살펴보자. 전기·중기 의병의 지도부는 주로 鄕校와 書院에 通文을 보내어 의병을 모집하였다. 그러므로 이들은 鄕會나 講會에 참석한 유생, 이른바 儒會軍이 매우 많았다. 따라서 투쟁하기 위한 의병이라기보다 상소운동이나 시위형태의 집단처럼 인식되었다. 黃玹은 장성의병에 대하여 “모인 사람들은 모두 深衣·大冠을 착용하고 서열에 따라 나아가고 물러났다. 이들은 군자금과 무기 나아가 紀律이 전혀 없어서 보는 자들마다 반드시 패할 것으로 예측하였다” 82) 라고 비판하였다. 물론 일반 병사층에는 砲軍과 농민들도 포함되었을 테지만, 그들은 대체로 용병적 성격이 강하거나 마지못해 가담한 소작인들이 많았으리라 짐작된다. 따라서 전기·중기 의병은 전투력과는 거리가 먼 탓에 단기간의 활동으로 그쳐버린 경우가 많았다. 이에 비하여 후기의병은 시장 등지에서 의병을 모았다. 대표적인 예로서 안규홍 의병부대는 직접 시장을 순회하거나 각지를 돌며 신체 건강하고 담력이 있는 자를 선발하였다. 이는, 양반 유생들이 의병을 모집하는 방법과는 상당히 달랐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호남지방 후기의병의 일반 병사층은 주로 농어민들이었을 것이다. 안규홍 의병부대의 경우에 가난한 농민이나 머슴들로 구성되었던 점으로 보아 그러하다. 후기의병의 주된 戰力이었던 해산군인이나 포수는 호남지방의 경우에 그리 많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함경도와 강원도의 경우에 후기의병의 주된 전력은 해산군인이거나 포수들이었다. 예컨대, 洪範道와 車道善이 이끄는 의병부대는 주로 砲手들로 구성되었으며, 83) 原州鎭衛隊의 해산군인들이 봉기한 閔肯鎬 의병부대는 당연히 해산군인들이 주된 전력이었다. 이에 비하여 호남지방 후기의병은 지역적 특성상 대체로 농민들이 많았다. 한편, 광주-전남 의병은 의병 구성원의 질적인 변화를 도모하였다. 즉, 전기의병은 儒生들이 82) 황현, 『매천야록』, 198쪽. 83) 朴敏泳, 『大韓帝國期 義兵硏究』(한울아카데미, 1998) 제2부 제1장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