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page

동학혁명 29 무장 당산에 집결한 1천여 명의 농민 중에는 영광과 법성포에서 온 사람들도 상당수 포함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들은 법성포 대밭에서 대를 베어다 죽창을 만들고 인근 지역을 돌며 조총을 비롯한 무기를 수집하고 군량미를 비축하였다. 또한 동학을 비방하는 사람들을 구타하기도 하였다. 영광과 법성포의 동학교인과 농민들이 무장기포의 주축을 이루었을 것으로 짐작되는 대목이다. 음력 3월 23일 전봉준 등 농민군 지도부는 이들을 이끌고 고부를 점령한 다음, 백산으로 이동하여 호남창의대장소의 이름으로 격문을 비롯한 4대 名義, 12개조 군율 등을 발표하였다. 당시 이들은 붉은 색 깃발에 輔國安民이라 썼으며, 또 작은 깃발에는 부안 고부 영광 무장 흥덕 고창 등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35) 영광은 6개 군현중 유일하게 현재의 전라남도 소속이다. 이로써 영광의 동학교인과 농민들이 무장기포 이후 적극적으로 활동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얼마 후인 음력 4월 4일 농민군 지도부는 법성포 吏屬들에게 폐막의 시정을 촉구하는 통문을 보냈다. 즉, “민폐의 근본은 吏逋에 있으며 이포의 근본은 貪官으로 말미암음이요, 그것은 또 집권자의 貪婪 이 근본” 36) 이므로 그것을 시정해달라고 주장한 것이다. 이는, 전주공격을 앞둔 긴박한 상황에서도 이러한 통문을 보낸 배경은 법성포에서 달려온 농민군의 요구사항을 수용한 결과일 것이다. 이러한 조치 직후인 초이렛날 농민군은 황토재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는데, 돌연 기수를 남쪽으로 돌렸다. 이들은 자신들의 역량이 아직은 미흡하다는 판단아래 농민군의 전투역량을 강화함과 동시에 배후의 지방 관아를 제압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곧바로 정읍 공격을 시작으로 다음날 흥덕과 고창, 9일에는 무장을 점령하여 사흘동안 주둔하였다. 이 과정에서 이들은 가는 곳마다 무기를 거두어 무장을 강화하는 한편, 억울한 죄수들을 풀어주었으며 자신들을 공격했던 보부상의 가옥과 자신들을 괴롭힌 향리들을 징치하거나 집을 불태워버렸다. 음력 4월 12일 1만명으로 세를 불린 이들은 영광을 공격하여 점령하자 이 소식을 법성포에서 전해들은 군수 閔泳壽는 배를 타고 도주하였다. 영광에서도 앞서와 마찬가지로 관아의 군기를 접수하고, 饒戶로부터 錢穀과 馬匹을 징발하였으며, 호적을 불태웠다. 37) 이틀후 법성포로 진군한 농민군은 九岫山 등지에 주둔하고서 정박한 배에 머물던 轉運局員과 일본인 항해사 나가노(永野源次郞) 등 5명을 징치하였다. 38) 이러한 상황을 전주에 주둔하던 초토사 洪啓薰은 다음과 같이 보고하였다. 동학도 1만여 명이 영광군에 屯聚하여 5리마다 伏兵을 두고 30리에 2천5백명씩 그 세가 浩大하며 날 로 더해져서 몇천 명인지 알 수 없다. 사방에서 모여들어 각처에 오가는 書字 연락이 번개처럼 빠르 35) 『隨錄』, 「갑오 4월 초5일」, 『東學農民戰爭史料大系』 5, 166쪽. 36) 『주한일본공사관기록』 1(국사편찬위원회, 1986), 20-21쪽. 37) 『동학농민혁명사 일지』(동학농민혁명참여자명예회복심의위원회, 2006), 58-59쪽. 38) 이상식 외, 앞의 책, 14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