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5page

한말의병 303 지금까지 유장렬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진 바가 없이 그저 이름만 전해져 왔다. 70) 그는 아마도 호남창의회맹소의 일원으로 참여하였다가 1909년을 전후해서는 부안을 비롯한 전라도 서부지역을 중심으로 독자적인 의병투쟁을 전개한 것 같다. 71) 강점이후 그는 한훈과 더불어 임병찬이 주도한 독립의군부, 1913년에 조직된 풍기 광복단, 1915년의 광복회에서 주로 활동하였다. 그의 활동에 대하여 당시의 신문기사를 참고해보자. 이름이 있는 유생으로서 일찍이 1천여명의 제자들을 가르쳤던 자인데 大正 4년경부터 폭도로 변하여 각처를 휩쓸며 부하도 상당히 있어서 출몰자재하는 교묘한 수단으로 수백여 처에서 강절도를 행하고 또 수년전 옥구군땅에 있는 잡화상 내지인 촌철횡일을 죽이고 돈을 빼앗은 후 종적을 감추었는데, (중 략) 그 일행 세명은 곧 단총을 놓으면서 저항함으로 한참 격투하다가 마침내 잡히어 전주경찰서로 인 치하였다는데 그들의 소지품은 오연발 육혈포 한자루와 폭발약 일본식 단도 탄환4개 오십전짜리 위 조지폐 넉장이라(每日申報 1919년 4월 13일자 「出沒自在ᄒᆞ던 强盜團」). 위의 인용문에 보이듯이, 그는 1915년 경부터 적극적인 무장활동으로 전환하여 각지를 돌며 군자금을 조달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 과정에서 일본인 잡화상을 처단하기도 했는데, 끝내 그는 동지 세명과 함께 1919년 4월에 체포되고 말았다. 그가 무장투쟁에 투신한 1915년은 광복회에 가입한 시기와 일치한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이로써 짐작컨대 그는 광복회에 가담한 후 전라도를 배경으로 주로 군자금 조달임무를 수행한 것으로 보인다. 요컨대, 한훈·유장렬의 행적만 보더라도 이들이 전개한 일련의 활동은 개별적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광복회 전라도지부의 차원에서 이루어졌다고 하겠다. 이들 외에도 벌교의 서인선 납치와 관련하여 체포된 바 있는 李秉華 72) 는 광복회 선전부장이었으며, 이병찬(호)는 전라도지부장이었다. 73) 이병화와 이병찬의 관계는 잘 알 수 없으나 동일인이 아님은 분명하다. 동일한 자료에 이병화는 선전부장, 이병찬은 전라도지부장으로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이병화는 雙山義所에 가담했던 이병화와 동일인일 가능성이 높다. 쌍산의소에서 이병화는 능주출신의 유생으로 쌍산의소의 서기로 활동하다가 의진이 해산된 후 은거한 사실만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가 어느 시기에 다시 의병계 비밀결사인 광복회에 가담하여 활동할 가능성이 없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광복회 전라도지부의 활동은 1919∼20년경에 종식된 것으로 추정된다. 앞서 보았듯이 유장렬·고제신 등이 1919년 4월에 체포되었고, 한훈은 1920년에 체포됨으로써 전라도지부는 큰 70) 조동걸의 연구에서도 유장렬은 ‘유장렬(?)’라고 처리되어 있다(「대한광복회의 결성과 그 선행조직」, 위의 책, 263 쪽). 그에 대한 간단한 이력조차 확인할 수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71) 『자료집』 별집 1, 664 721 참조. 72) 동아일보 1922년 3월 3일자 「寶城富豪를 暗殺한 리병화는 경성에서 톄포」. 73) 김희곤 편, 『박상진자료집』, 387-38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