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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2 민주장정 100년, 광주·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유장렬이나 이병화 등의 행적을 살펴보면 이들의 활동을 개별적으로 파악하기 보다는 광복회 전남지부의 활동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믿는다. 1916년 5월말 한훈 등은 벌교의 부호인 徐道鉉을 총살시켰다. 그후 서도현의 당질인 徐仁善을 납치하여 군자금 5만원을 요구하여 1만원을 강징한 바 있다. 63) 이들은 또한 보성 박곡의 梁在誠을 처단하였으며, 이어서 보성군 조성면의 鳥城憲兵分隊 64) 를 습격하여 무기를 탈취하는 등의 활동을 벌였다. 이와 같이 이들은 전남 보성군의 부호 2명을 처단하였으며, 조성헌병분대를 습격, 무기를 조달하는 등 적지 않은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들은 비협조적인 부호를 처단함으로써 군자금 조달을 용이하게 하는 한편, 부호들의 경각심을 일으키려는 것이었다. 65)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은 광복회 전라도지부에 의해 주도되었으리라 믿어진다. 이러한 사건을 주도한 핵심인물로는 한훈·유장렬 등이 꼽힌다. 66) 한훈에 의하면, 이들이 위에 열거한 일련의 사건을 자신들이 주도한 것으로 회고했다. 실제로 이들의 활동은 당시 일제 경찰에 의해서도 포착되었다. 그 결과 이들은 1919∼20년 사이에 각각 체포되어 15년 이상의 중형에 처해졌다. 67) 한훈은 향리인 청양에서 漢學을 수학하던 중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1906년에 홍주의병의 召募將으로 활동하였다. 68) 그후 기산도·나인영 등과 5적을 암살하기 위해 결사대를 조직한 바 있으며, 5적의 저격이 실패로 돌아가자 다시 의병에 투신하여 활동하다가 만주로 망명했다. 그후 1911년에 귀국하여 이듬해에는 독립의군부에 참여하였으며, 1913년에는 풍기의 광복단에 유장렬과 같이 가담하였다. 2년후 그는 광복회에 가담하여 전라도지부의 활동에 주력했다. 1919년에 그는 광복단결사대를 조직하여 齊藤實 總督 등 일본인 고관을 살해하려다가 체포되어 23년형을 선고받아 형무소를 전전하던 중 중병에 걸려 19년 6개월만에 형집행정지로 풀려나 해방을 맞았다. 그가 충남 청양출신임에도 주로 전라도에서 활동하게 된 배경은 잘 알 수 없다. 다만, 그가 이미 기산도와 나인영 등이 주도한 5적암살단에서 활동하였다는 점, 만주로 망명했다가 돌아온 후 독립의군부에 참여한 점에서 알 수 있듯이 비교적 일찍부터 호남인들과 교유했던 것에서 시사점을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특히, 그와 활동을 같이했던 유장렬은 아마도 의병활동을 하던 과정이나 만주에서 귀국하여 독립의군부에서 활동하다가 서로 알게 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 이후 이들은 동일한 노선을 걸었다. 유장렬은 1천여 명의 제자를 배출할 정도로 유명한 서당 훈장을 지낸 유학자였다. 69) 하지만 63) 동아일보 1922년 11월 12일자. 64) 일부의 글에서는 전북 순창의 鳥城憲兵分隊(또는 오성헌병분대)라고 표기한 경우도 없지 않으나(이명화, 앞의 글, 6 쪽 및 국가보훈처 인터넷 사이트 ; ‘이 달의 독립운동가 한훈’), 전남 보성군 조성면의 조성헌병분대의 誤記임이 분명 하다. 65) 권대웅, 박사학위논문, 65쪽. 66) 김희곤 편, 『박상진자료집』, 379-380쪽. 67) 김희곤 편, 『박상진자료집』, 「대한광복단」, 380쪽 및 『독립유공자공훈록』 7, 520쪽. 68) 한훈의 행적에 대해서는 해방 직후에 남긴 자필이력서를 참고하였다(김희곤 편,『박상진자료집』, 379-80쪽). 69) 매일신보 1919년 4월 13일자 「出沒自在ᄒᆞ던 强盜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