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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0 민주장정 100년, 광주·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출신으로, 1909년을 전후한 시기에 전라도 서부지역에서 의병장으로 활약한 바 있다. 48) 또한 그는 독립의군부에 가담한 것으로 전해진다. 49) 그는 1910년이후 주로 한훈과 같은 노선하에 활동한 점에서 주목된다. 그 밖에도 광주의 李明瑞, 경기도 파주 출신의 崔勉植 등도 광주에서 활동중이었으며, 50) 李秉華 高濟臣 金泰守 朴文鎔 등도 광복회 전라도지부와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 51) 이들에 대해서는 대체로 단편적인 사실만 전할 뿐이어서 간단한 이력사항조차 잘 알 수 없다. 이병호는 1918년 당시 32세로서 전남 보성 출신이었다. 그는 測量業에 종사하였으며, 채기중의 권유를 받아 광복회 전남지부의 책임자로 활동하였다. 52) 최면식은 태인의병을 주도했던 최익현의 손자였으며, 53) 이병화는 쌍산의소의 서기로 활동한 이병화와 동일인일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54) 고제신은 전북 부안출신이었는데, 55) 나머지 인물들의 경우에는 행적조차 밝히기 어렵다. 이와 같이 간단한 이력사항을 아는 정도이거나 행적조차 잘 알 수 없기 때문에 광복회 전라도지부는 거의 주목받지 못했다. 56) 하지만, 현재 남아있는 자료를 잘 활용한다면 좀더 구체적인 사실들을 파악할 수 있으리라 기대된다. 그러면 광복회 전라도지부의 활동과 특징에 대하여 살펴보기로 하자. 광복회를 주도했던 박상진은 중국의 신해혁명에서 영향을 크게 받았으며, 조선에서도 혁명을 할 수 있기를 기대하였다. 57) 그는 광복회의 4대 강령으로 비밀·폭동·암살·명령을 매우 강조하였다. 58) 그 가운데 암살은 즉각적인 실행이 가능하다고 판단하였다. 59) 그리하여 이들은 악질적인 친일부호의 처단에 적극적으로 나섰던 것이다. 또한 광복회는 다음과 같은 實踐方略을 수립하였다. 1. 武力準備: 一般富豪의 義捐金과 日本人이 不法 徵收하는 稅金을 押收하야 此로써 武裝을 準備함. 2. 武官養成: 南北 滿洲에 士官學校를 設置하고 人材를 敎養하야 士官으로 採用함. 3. 軍人養成: 我大韓의 由來義兵, 解散軍人及南北滿洲移住民을 召集하야 訓練採用함. 48) 『자료집』 별집 1(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4), 664·721쪽. 49) 김희곤 편, 『박상진자료집』, <대한광복단>, 379쪽. )) 한편, 이들 가운데 柳璋烈이 주목된다. 그는 고창 등지에서 의 병투쟁을 전개하다가 영남지역 의병계열인 蔡基中 등이 주도한 광복단에 이어 대한광복회에서 활동하였다. 그가 영남 지역 비밀결사에 합류한 것은 전라도의 항일조직이 와해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전국적인 조직체의 결성 할 목적도 포함된 것으로 믿어진다. 하지만 그 역시 1919년 4월에 체포되고 말았다(每日申報 1919년 4월13일자 참 조). 50) 김희곤 편, 『박상진자료집』, 35쪽과 『독립운동사자료집』 11, 679 701쪽 및 권대웅, 박사학위논문, 55쪽 등 참조. 51) 東亞日報 1921년 3월 6일자·6월 25-26일자 1922년 3월 3일자 11월 12일자 참조. 52) 김희곤 편, 『박상진자료집』, 35 40-1쪽 및 『자료집』 11, 692·706쪽 참조. 53) 김희곤 편, 『박상진자료집』, 35쪽 및 『독립유공자공훈록』 7, 687쪽 참조. 54) 梁會一, 『杏史實紀』 권 4, 「書記 李秉華」 참조. 55) 장석흥, 앞의 논문, 61쪽 각주 71 참조. 56) 조동걸, 위의 글, 288-289쪽. 57) 『자료집』11, 685-688쪽. 58) 위의 책, 685 688-670쪽 ; 조동걸, 「대한광복회연구」, 292 310쪽. 59) 위의 책, 68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