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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8 민주장정 100년, 광주·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부군에 주둔하는 일본군 병참에 투서하는 운동을 전개하려는 것이었다. 또한 장서운동 직전에 각 고을마다 태극기를 게양하기로 하였다. 거사 후에는 곧바로 향약을 실시할 예정이었으나, 거사 전에 발각됨으로써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다만, 임병찬은 체포된 후에도 총독면담을 신청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대신에 경무총감을 면담하면서 총독과 일본 총리대신에게 서한을 보내줄 것을 요청하였다. 34) 그리하여 그는 국권의 반환을 요청하는 자신의 소신을 서신으로 밝혔다. 이 점만 보더라도 독립의군부의 장서운동은 외교적 노력에 의해 국권을 반환받으려는 시도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독립의군부는 동지들을 규합하는 과정에서 조직이 노출되고 말았다. 즉, 1914년 음력 5월 하순에 독립의군부에 가담했던 金昌植 35) 이 일제 경찰에 체포된 것이다. 당시 김창식을 비롯한 이기영 등 11명이 피체되었던 이 사건은 독립의군부의 군자금을 모으는 과정에서 발생한 것이었다. 36) 이들중 대다수는 충청도와 경기도 출신들로서 임병찬과 허위와 관계가 있는 인물들이었다. 그런데 이 사건의 연루자인 尹浩 등은 1913년 음력 2월경 전북 군산 부근에서 동지들과 회합하여 大韓僑民光鮮會라는 비밀단체를 결성하였다. 이들은 1914년 5월 서간도 哈泥河에 거주하며 光濟會를 조직하여 呂準 등과 독립운동에 관한 의견을 교환하였다. 37) 이처럼 독립의군부의 일부 인사들은 해외독립운동세력과 연계하여 군자금 조달과 동지의 규합에 앞장섰다. 이 외에도 일제 경찰은 독립의군부에 관련된 54명의 명단을 확보하였다. 38) 결국, 이 사건을 계기로 임병찬을 비롯한 수십 명이 1914년 음력 5월에 체포됨으로써 독립의군부의 조직은 무너지고 말았다. 결국, 임병찬은 그해 음력 6월 거문도에 유배되어 1916년 음력 5월에 그곳에서 운명하였다. 39) 독립의군부에 가담했다가 체포를 면한 인사들은 다른 비밀결사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예컨대, 한훈 유장렬 이은영 이세영 김낙문 등이 그들이다. 이들은 경상도를 거점으로 활동하는 광복회와 민단조합에 참여하여 항일활동을 이어갔던 것이다. 이상과 같이 의병운동 계열의 독립의군부는 초기에는 복벽주의 단체였으나, 차츰 서간도의 독립운동세력과의 연대활동을 강화해갔다. 40) 또한 조직이 와해된 이후에도 체포를 면한 인사들은 다른 비밀결사에 합류하여 독립의지를 불태웠다. 34) 위의 책, 244-245, 287쪽. 35) 김창식은 경기도 고양 출신으로 1908년 경기·강원도에서 주로 활동한 이인영 의병부대의 右軍將으로 활동하다가 체 포되어 15년 유배형을 받은 인물이다(「金昌植 韓元泰 李起商 평리원 판결서」, 1908.6.6.). 이때 독립의군부의 핵심 인물인 이기상은 7년 유배형을 받았다. 김창식은 독립의군부 사건으로 强盜傷人 죄목으로 재판을 받아 징역 15년형을 받았다(「김창식 이기영 이용철 정철화 윤호 판결문」, 경성복심법원, 1915.7.23). 36) 권대웅, 앞의 책, 81-82쪽. 37) 「김창식 이기영 이용철 정철화 윤호 판결문」, 경성복심법원, 1915.7.23 ; 권대웅, 앞의 책, 84-85쪽. 38) 『고등경찰요사』, 1934, 177-179쪽 ; 『국역 고등경찰요사』, 335-337쪽. 39) 임병찬, 위의 책, 245-247 287쪽 ; 홍영기, 「遯軒 林炳瓚과 巨文島 유배생활」, 『海洋文化硏究』 7·8호 합집, 전남 대 이순신해양문화연구소, 2012. 40) 권대웅, 앞의 책, 85-8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