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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민주장정 100년, 광주·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광양 등 약 10개 군현에서 참여한 것 같다. 31) 전라북도에서는 약 10여 개 군현에서 참여했으므로 전라도 전체로 보면 20여 개 군현의 동학교인들이 보은으로 달려간 것이다. 하지만 얼마지나지 않아 어윤중의 해산명령으로 애써 찾아온 보람도 없이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즉 음력 4월 2일 영광의 동학교인들은 함평 남원 순창 무주 태인 지역 교인들과 함께 보은에서 물러나왔다. 32) 귀향후 별다른 활동을 보이지 않던 영광의 동학교인들이 무장기포에 적극 가담하였다. 33) 그것은 이들이 고창대접주 손화중과 직간접으로 연계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1894년 음력 3월 중순 무장기포의 진원지인 무장현 堂山은 지리적으로 매우 가까운 곳이었다. 한편, 무장기포 직전인 음력 2월 28일 수령의 가렴주구를 비롯한 각종 弊瘼 의 시정을 요구하며 영광군민들이 ‘民亂’을 일으킨 바 있었다. 34) 당시 김국현을 狀頭로 한 읍민들이 폐막을 바로잡으려는 목적으로 죽창을 들고 관아를 점령했는데, 이 사건은 그 직전에 발생한 고부농민봉기에서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이러한 요인들로 인해 영광과 법성포의 동학교인과 농민들이 무장기포시 적극적으로 활동하게 되었으리라 짐작된다. 무장현감 趙命鎬는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보고하였다. 이달(3월-저자주) 16일 무장현 冬音峙面 堂山 땅에 정체를 알 수 없는 亂類輩 수천 명이 무리를 모아 가까이 다가와 머무르고 있으며, 그들의 종적이 수상하다고 전하는 이야기들이 널리 퍼져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영리한 서리와 장교를 보내어 몰래 조사하여 알아보니, 이들은 본 읍의 백성들이 아니었고, 거의 모두가 다른 읍의 백성들이었습니다. 해당 촌 백성들의 집에 모였는데 東學徒라고 칭하였습니다. 처음에는 100여 명을 넘지 못하였으나, 16일부터 18일까지 며칠 사이에 밤낮으로 사방에서 몰려와 천여 명이나 되었는데, 모두가 해당 촌의 앞에 있는 평야에 모여 있었습니다. 거주하는 곳이 靈光과 法聖 양 읍의 경계에 서로 이어져 있었습니다. 저들 무리 중 수백 명이 법성 陳良面 龍峴里의 대나무 밭이 있는 곳에 가서 대나무를 베어 창을 만들었고, 혹은 각처에 있는 촌민의 집에 사람을 보내어 남아 있는 약간의 조총과 쇠뇌와 낫과 삽 등의 물건을 일일이 수색하여 빼앗아 갔습니다. 그들은 소위 자신들의 學을 비방하거나 그들의 학에 반대하는 사람과 일찍이 혐오했던 자를 모두 잡아가서 구타하였습니다. 이웃마을 石橋村 安德必의 집에 알 수 없는 어떤 사람이 미리 사 놓은 쌀이 있었는데, 백미 60여 석도 또한 빼앗고 곧바로 그 집을 헐었습니다. 해당 촌에 사는 宋京洙 집의 재산도 부숴 버렸습니다. 이러한 까닭으로 이웃하는 면에서 소요가 일어나면 평민들은 흩어졌습니다. 진실로 저들이 한 짓을 살펴보면, 참으로 큰 변괴입니다(『隨錄』, 「갑오 3월 27일 啓草」, 『동학농민전쟁사료대계』 5, 159-160쪽). 31) 이상식 외, 『전남동학농민혁명사』, 132쪽. 32) 『취어』, 『동학농민전쟁사료대계』 2, 74쪽. 33) 이상식 외, 앞의 책, 134-135쪽. 34) 황현, 『오하기문』 首筆 ; 『동학농민전쟁사료대계』 1(여강출판사, 1994), 5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