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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말의병 295 토록 하였다(『의병항쟁일기』, 한국인문과학원, 1986, 286쪽). 그가 그해 정월 독립의군부의 ‘全羅南北道巡撫大將’에 임명된 이후 전라도에서 동조세력의 규합에 나섰음을 알 수 있다. 수개월후인 음력 11월에 그는 거의방략이 담긴 「관견」을 완성함으로써 거사를 도모할 준비가 거의 완료된 것으로 보인다. 21) 국권을 되찾기 위한 임병찬의 구상인 「管見」은 고종에 의해 수용되었을 것으로 믿어진다. 왜냐하면 「관견」을 작성한 직후 임병찬은 세 차례의 추가적인 밀칙이 내려진 점 22) 에서 그러하다. 이러한 밀칙을 통해 임병찬은 독립의군부의 결성과 관련된 전권을 위임받은 셈이었다. 그는 고종의 두터운 신임을 받으며 독립의군부의 결성을 적극적으로 추진했을 것이다. 임병찬은 방략이나 거사시기, 구성원의 선발 등에 대하여 독립의군부의 결성을 주도한 앞서의 인물들과 긴밀히 협의하였다. (1914년 2월) 25일 參判 李明翔 李寅順 및 蔡相德 郭漢一 등 여러 인사들이 집에 와서 함께 일을 논 의하였다(임병찬, 「거의일기」, 『의병항쟁일기』, 241쪽). 1914년 음력 2월, 임병찬은 전직 고위 관료 및 양반 유생들과 더불어 거사를 논의했다는 것이다. 이들 외에도 그는 김재순 전용규 이식 등과도 긴밀하게 협의하였다. 이상에서 거론된 인물들이 독립의군부의 지도부를 형성한 것으로 보인다. 이 가운데 김재순 이식을 제외하고는 모두 總代表에 포함되어 있는 인물들이다. 한편, 임병찬은 아들 應喆을 비롯한 지인이나 제자들로 하여금 전라도 지역을 순회하며 ‘충신 의사의 후예’들을 독립의군부에 끌어들였다. 23) 당시 임병찬은 전라남북도에서는 상당한 호응을 얻은 것 같다. 그 결과 1914년 음력 3월에 그는 독립의군부의 편제를 확정할 수 있었다. 이무렵 임병찬은 이명상 이인순 등과 협의하여 총대표 및 각도 각군 대표를 선정하였다. 24) 총대표에는 임병찬 자신을 비롯한 이명상 이인순 등 13명으로 구성되었으며, 각도 대표에는 경기도 최익현의 아들 崔永卨을 비롯하여 21) 독립의군부와 「관견」에 대해서는 다음의 글이 참고된다. 신규수, 「대한독립의군부에 대하여」, 『변태섭박사 화갑기념 사 학논총』(삼영사, 1985) ; 이상찬, 「대한독립의군부에 대하여」, 『이재룡박사 환력기념 한국사학논총』(신서원, 1990). 22) 임병찬의 「擧義日記」에 따르면, 그는 1912년 음력 9월 28일 충청도 공주유생 李侙 이 전달한 칙명에 의해 ‘全羅南道 巡撫大將’에 임명되었다. 이때 인재를 선발할 때 편의에 따르도록 허락받았고, 또한 안으로는 義勇之士를 규합하고 밖 으로는 문명열강의 도움을 받아 백성들을 구제함으로써 독립을 만회하라는 지시를 받았다(『의병항쟁일기』, 284-285 쪽). 1913년 음력 정월에 그는 ‘全羅南北道 巡撫大將’에 임명되었으며, 우선적으로 復國할 수 있는 방안을 도모하라 면서 密符를 전해받은 바 있었다. 그리고 1914년 음 2월에는 ‘全羅南北道 巡撫總將兼司令長官’, 同 3월에는 ‘陸軍副 將全羅南北道 巡撫總將’, 同 5월에는 ‘陸軍參將’ 등의 임명장과 함께 고종의 密詔가 거듭 내렸음을 알 수 있다(위의 책, 285-286쪽). 23) 임병찬, 「거의일기」, 239-240쪽. 24) 임병찬, 「거의일기」, 241-24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