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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말의병 291 강형오 의병부대는 1909년 9월 이른바 ‘남한폭도대토벌작전’이 시작되기 직전에 큰 타격을 받아 해산된 것으로 믿어진다. 이때 해산됨으로써 강형오 의병부대는 ‘남한폭도대토벌작전’ 당시에는 상대적으로 피해를 적게 입은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당시 경남 통영의 연내도에 피신함으로써 일본군의 대규모 군사작전 당시에 체포를 면한 것으로 보인다. 그로 인해 일제는 ‘남한폭도대토벌작전’ 중에 소재불명인 의병장 6명중 1인으로 강형오를 지목하고 있다. 4) 연내도로 피신한 강진원은 일본군의 무자비한 군사작전이 종료되자 순천으로 돌아온 것으로 짐작된다. 그는 의병봉기 이전에 자신이 서당을 개설했던 쌍암면 두모리에 위치한 五聖山 동굴에 은신하였다. 5) 아마도 이 시기에 그는 남평 문씨와 혼인하여 1남 1녀를 두었으나, 1921년 여름 母子가 홍역을 앓다가 동시에 사망하고 어린 딸만 남아 있었다. 6) 그런데 오성산 동굴에 은신해 있으면서 그는 독립운동을 포기하지 않았던 것 같다. 한편, 그는 이 시기에 제자를 길렀다. 때로 제자들이 심경을 물으면 그는 “敗將이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라는 한마디뿐이었다고 한다. 7) 그는 10여 년 동안 장영섭을 비롯한 제자 양성에 주력하였다. 그러던 중 동지이자 부하인 김화삼이 순천 괴목장에 나갔다가 괴목주재소 순사들에게 체포되어 취조과정에서 그의 은신처가 노출되고 말았다. 8) 당시 김화삼은 괴목장에서 일본 순사에게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받던 중에 강진원의 은신처를 발설하게 된 것이다. 9) 1921년 8월 21일 일제는 그를 체포하기 위해 괴목 월등 쌍암 주재소 순사들이 연합하여 강형오의 거처를 급습하였다. 다음의 신문 기사가 그러한 상황을 알려준다. 日韓合倂當時의 義兵首領 姜大將의 逮捕 경관 여섯명이 에워싸고 중상을 당하여 가며 체포 전라남도 순천군 서면 출생(全南 順天郡 西面 出生)으로 목하 주소가 일정하지 못한 강형오(姜亨吾) 통칭 강대장(姜大將)이라 하는 방금 삼십사세된 청년은 일한합병후(日韓合倂後)부터 의병이라 하고 부하 수백명을 거나리고 전라남북도 지방으로 돌아다니면서 헌병대와 수비대로부터 두어 번이나 충 돌이 되여 소로 총을 겨누고 돌아다니는 바 부하가 태반이나 귀순함에 그 후에 오륙명의 동지자를 부 하에 두고 강도단을 조직하여 두어 번이나 활동하였으나 강대장은 그 재주가 신출귀몰하여 용이하게 체포치 못하든 바 요사이 그 부하 한명이 순천군 괴목경관주재소(槐木警官駐在所)에 체포되어 취조 를 받는 중에 그 자백에 의지하여 강대장이 순천군 쌍암면 두월리(順天郡 雙巖面 斗月里)에 있는 줄 4) 『편책』, 『독운사』 15, 822 826쪽. 5) 『약전』, 163쪽. 6) 위의 책, 174쪽. 7) 위의 책, 164쪽. 8)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1921년 8월 31일자. 9) 『약전』, 16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