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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0 민주장정 100년, 광주·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제5장 광주-전남 전환기의병의 결성과 활동 1910년 8월 대한제국은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하였다. 하지만 국내의 민족운동가들은 국권을 되찾기 위한 노력을 포기하지 않았다. 이들은 국외의 독립운동 세력과 연계하거나, 비밀리에 단체를 조직하여 광복의 꿈을 도모하였다. 따라서 1910년대 국내의 독립운동은 의병계 인사들에 의해 비밀결사의 형태로 추진되었다. 1) 한말 후기의병의 중심지였던 호남지역은 이른바 ‘남한폭도대토벌작전(1909.9-10월)’으로 수많은 의병들이 순국하거나 체포, 투항하였다. 참혹하기 짝이 없는 피해와 희생 속에서 살아남은 의병계열 인사들은 지하활동을 지속하며 조국의 독립, 즉 광복운동을 도모하였다. 이에 이 글에서는 강점이후 살아남은 호남지역 의병계열의 秘密結社를 다루고자 한다. 그 중에서도 강형오의 비밀결사를 비롯한 이석용 중심의 壬子密盟團, 그리고 임병찬이 주도한 獨立義軍府 2) 와 광복회 전남지부에 대해 검토할 것이다. 이를 통해 의병항쟁의 독립운동으로의 전환과 그 역사적 의미를 조망하고자 한다. 1. 姜亨吾와 비밀결사 강형오(1881∼1921)는 晉州姜氏로서 그의 이름은 매우 다양하게 나타나기 때문에 상당히 혼란스럽다. 일본측 자료에는 姜勝宇 姜承旨 姜汝明 姜義淵 등의 이름으로 나타나는데, 모두 강형오와 동일인으로 믿어진다. 3) 아울러 1921년 8월 체포될 때 姜亨吾 역시 그의 이름이므로 그는 변성명에 능통했던 인물로 이해된다. 이를 종합해 볼 때 그의 본명은 강진원(姜振遠 혹은 姜震遠), 자는 亨吾(혹은 炯吾, 亨佑, 勝宇), 의병활동 시에는 여러 개의 가명을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당시 의병장 가운데 상당수가 가명 혹은 別稱을 사용한 사실만 보더라도 그 역시 가명을 사용한 것으로 추정되는 것이다. 당시 의병들이 가명이나 별칭을 사용하게 된 배경은 일본 군경의 추적을 피하기 위한 의도와 관련이 깊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강진원의 이름은 앞서 보았듯이 매우 다양하게 일본군경에 포착되었으리라 짐작된다. 강형오는 1908년 음력 6월이래 그가 의병을 해산한 1909년 음력 8월까지 반일투쟁을 전개하였다. 당시 그는 전남 동부지역, 주로 순천 곡성 여수 고흥 광양 구례와 전북 남원을 무대로 활동하였다. 1) 최영희, 「3·1運動에 이르는 民族獨立運動의 原流」, 『3·운동50주년기념논문집』(동아일보사, 1969) ; 박걸순, 「3·1 運動期 國內 秘密結社運動에 대한 試論」, 『한국독립운동사연구』 2(1988), 168-173쪽 ; 권대웅, 『1910년대 국내독립 운동』(독립기념관, 2008). 2) 독립의군부는 흔히 ‘대한독립의군부’로 잘못 알려져 있다. 다음의 논문제목만 보더라도 그러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 다. 申圭秀, 「大韓獨立義軍府에 대하여」, 『邊太燮博士 華甲紀念 史學論叢』, 삼영사, 1985 ; 李相璨, 「大韓獨立義軍府 에 대하여」, 『李載龒 博士 還曆紀念 韓國史學論叢』, 신서원, 1990 ; 권대웅, 앞의 책, . 하지만 필자는 이 단체의 정식 명칭이 독립의군부임을 밝힌 바 있다(홍영기, 「1910년대 전남지역의 항일비밀결사」, 『전남사학』 19, 2002, 400쪽 각 주 28). 따라서 이 글에서는 독립의군부로 표기할 것이다. 광복회의 경우에도 흔히 ‘대한광복회’ 등으로 잘못 알려진 까닭에 명칭을 바로잡기 위한 논문이 발표된 바 있다(이성우, 「光復會 명칭과 성격에 대한 검토」, 『한국근현대사연구』 41, 2007년 여름호). 3) 『순천시사』 정치 사회편(큰기획, 1997), 569쪽. 이 글에서는 이름으로 인한 혼란을 피하기 위해 강형오로 통일해서 사용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