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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혁명 27 인식하고서 그들을 몰아내기 위해 재봉기한 것이다. 28) 이로써 농민군 지도부는 집강소 활동보다는 반외세활동으로 국면을 전환하였다. 이상과 같이 동학농민혁명은 조선사회의 심각한 부정부패, 특히 삼정의 문란뿐만 아니라 수령과 이서배들의 일상적 탐학이 큰 배경의 하나로 작용하였다. 또한 평등과 개벽, 반외세와 반침략을 강조하는 동학 사상이 농민봉기에 큰 영향을 주었으며, 교조신원운동 과정에서 더욱 강고한 교단 조직으로 완성된 抱接制가 농민봉기에 일정한 영향을 주었던 것이다. 다만, 이러한 국내 요인이 제1차 동학농민혁명의 배경이 되었으나, 제2차 동학농민혁명은 전혀 다른 국외 요인인 ‘갑오변란’ 즉 일본군의 경복궁침범사건이 결정적인 배경으로 작용하였다. 이로써 동학농민혁명은 반봉건운동에서 반침략운동으로 전환해갔다. 제2장 동학의 수용과 제1차 동학농민혁명의 지역별 전개 광주-전남의 동학농민군은 몇 개의 권역으로 나누어 활동하였다. 1894년 음력 1월에 발생한 고부농민봉기와 뒤이은 무장기포 소식은 가까운 전라우도 지역에 먼저 전달되었을 것이다. 특히 고부와 인접한 영광과 장성 등 현재의 전남 서부지역에는 곧바로 소식을 전해들었으리라 믿어진다. 무장기포이후 백산에서 집결한 농민군은 황토재전투에서 승리한 후 농민군을 이끌고 고창 영광 무안 함평 등 전라우도를 순회하며 군사력을 강화해갔다. 이에 이 글에서는 전남 서부지역을 비롯한 농민군의 활동반경을 고려하여 권역별로 나누어 살펴보고자 한다. 즉, 광주-전남지역 동학농민군의 활동은 크게 5개의 권역으로 구분하되, 권역내의 군현별로 검토할 겻이다. 이처럼 현재의 3-6개 시 군 단위로 농민군의 활동이 이루어졌음을 확인할 수 있었고, 그에 따른 선행연구 29) 를 토대로 농민군의 발자취를 서술하고자 한다. 1. 전남 서부지역 동학농민군의 동향 현재의 전라북도 고창군과 인접한 영광은 비교적 일찍 동학을 수용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아마도 1890년대 초에 동학이 들어온 것으로 보인다. 영광의 동학교인 등 100여 명이 1893년 음력 3월 27일 보은집회가 참가한 것으로 보아 그러하다. 30) 이들은 아마도 족히 1주일여를 걸어 보은에 당도했을 것이다. 이들 뿐만 아니라 현재의 광주-전남에서는 무안 함평 나주 영암 강진 장흥 진도 고흥 순천 28) 신용하, 『東學과 甲午農民戰爭硏究』(일조각, 1993), 288쪽. 29) 이상식 외, 『전남동학농민혁명사』(전라남도, 1996). 이 글은 앞서 밝힌 바와 같이 이 책의 연구성과를 전적으로 활용하였 다. 따라서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일일이 각주를 달지 않았음을 밝힌다. 30) 『聚語』, 『東學亂記錄』 上 ; 『동학농민전쟁사료대계』 2(여강출판사, 1994), 5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