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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6 민주장정 100년, 광주·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보더라도 당시 안규홍 의진의 반일투쟁이 얼마나 활발했는지를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머슴출신의 안규홍 의진은 전국 유일의 '머슴군 의병'으로서 뛰어난 반일투쟁을 전개하였다. ‘가장 용감하고 가장 출몰이 기민한 의병장’이라는 평을 받았던 의병장 안규홍은 1910년 6월 22일, 부대장 염재보와 손덕호, 정기찬은 7월 18일 대구감옥 형장에서 순국하였다. 368) 안규홍 의진은 대중적 기반과 투쟁역량을 두루 갖추어 효과적인 항일투쟁을 전개함으로써 1908- 1909년 사이에 보성을 비롯한 전남 동부지역의 대표적인 의진이란 명성을 얻었다. 또한 이들은 주민을 보호하기 위한 안민적 의병활동을 지향한 가장 대표적인 의진이었다. 그러한 배경에는 의병장 안규홍을 비롯한 대부분의 구성원들이 바로 이 지역 출신인데다 가난한 농민들이었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4) 황병학 의병부대 전남 동부지역의 끝자락인 광양에서도 후기의병이 일어나 반일투쟁을 전개하였다. 광양지역의 후기의병은 광양 진상면 飛村에서 살던 黃炳學(1876-1931)의 주도로 일어났다. 그는 종숙인 黃珣模, 구례의 韓圭順 등과 힘을 합해 백운산을 의병의 근거지를 삼았다. 백운산의 깊은 골짜기와 험준한 산세는 의병의 유격투쟁에 안성맞춤이었기 때문이다. 1908년 음력 7월 하순, 백운산에 모인 약 200명 내외의 의병들은 “나라의 원수를 갚지 못하고 화액이 머리에까지 박두했으니 얼굴에 상처를 입고 살 바에는 차라리 원수를 갚고 죽는 것이 낫지 않는가”라고 맹세하며 의병을 일으켰다. 이 자리에서 지략과 담력이 뛰어난 황병학은 의병장에 추대되었고, 황순모(1873-1908)는 선봉장을 맡았다. 황병학 의병부대는 주로 광양을 비롯한 전남 동부 및 경남 서부 지역의 농민이나 산포수들로 구성되었다. 대오를 정비하고 무기를 확보한 의병장 황병학은 먼저 望德 포구를 차지한 일본세력을 쫓아내기로 했다. 당시의 상황을 일본측은 아래와 같이 기록하고 있다. (1908) 9월1일 오전 3시 비도 50명(양총 3·화승총 25)이 광양군 진하면 망덕리에 내습, 일인 어부 오까야마현 사람(岡山縣人) 가꾸노(角野仁三郞)와 그의 처 「이소」 및 장남 「아끼라(明)」를 총살하고 가옥을 불사른 다음 이 마을의 잡화상 고오지현 사람(高知縣人) 이시다(石田耕作) 집에 내습, 고용인 다까하시(高橋吉助)를 바다에 던져 익사케 하고 또 해안에 매어둔 일본어선을 불살랐다(『폭도사』, 62쪽). 급습을 당한 일본 어부들은 적지 않은 피해를 입었으며, 일제 군경은 곧바로 황병학 의병부대의 368) 지금까지 안규홍은 1911년 음력 5월 5일 순국한 것으로 알려져 왔으나, 『구한국 관보』 1910년 6월 28일자에 의하 면 안규홍은 6월 22일, 같은 책 7월 27일자에 의하면 염재보 등은 7월 18일자로 교수형이 집행되었음을 알 수 있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