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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4 민주장정 100년, 광주·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참여하였다. 359) 그리하여 이들은 좀더 굳건한 연합전선을 결성하기 위해 전북 순창과 전남 장성 등지에서 여러 차례 모인 것으로 추정된다. 360) 연합전선의 구축에 참여한 의진 가운데에는 유생의병장인 전해산이 이끄는 의진부터 한미한 머슴 출신이 이끄는 안규홍 의진까지 모두 11개 의진이 참여하였다. 다시 말해서 다양한 신분의 의병장들이 모두 참여하였으나, 비교적 성공적으로 연합전선을 구축하였다. 그러자 일제는 1909년 6월에 이르러 의병의 소재와 근거지를 파악하기 위한 變裝偵察隊를 편성하였다. 361) 그들의 주된 목적은 당시 가장 우세한 의병장인 안규홍·전해산·심남일이 이끄는 의진의 근거지를 찾는데 있었다. 따라서 이들은 위의 세 의병장의 주된 활동무대인 보성·순천 방면, 광주·라주 방면, 장흥·영암 방면으로 나뉘어 파견되었다. 아울러 이들은 14-5명으로 편성된 토벌대와 수시로 연락하면서 정찰 임무를 수행하는 한편 별도의 공공사업을 일으켜 주민들의 환심을 사는데 노력하였다. 주요 의병의 근거지가 어느 정도 파악되자, 일제는 호남의병을 근절시킬 결정적인 계획을 수립하였다. 이것이 이른바 南韓暴徒大討伐作戰이다. 아다시피 ‘남한폭도대토벌작전’은 전라도, 특히 전남지방의 의병을 뿌리뽑기 위한 초토화작전이었다. 일제의 무자비한 군사작전은 1909년 9월 1일부터 10월말까지 실시되었는데, 보병 2개 연대, 공병 1개 소대, 기선 1척, 기정(汽艇) 약간, 그리고 해군 11함대 등이 동원되었다. 362) 대규모의 병력을 한꺼번에 투입하여 육지는 물론 해상에 이르기까지 완벽한 포위선을 구축하여 의병을 철저히 색출하려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일본 군경이 재배치되는 긴박한 상황이 목격되자, 안규홍은 1909년 8월말 임창모를 비롯한 지휘부 의병들과 회합을 가졌다. 임창모가 (8월) 29일 밤 그 마을(문전면 구피곡촌 -저자주)에 오자, 안진(안규홍-저자주)과 수괴 및 부수괴에 관해(원인은 상세불명) 언쟁을 하고, 천보장 임(任) 및 임모 등의 중재로 우선 진정(『편책』, 『독운사』 15, 489쪽). 안규홍과 임창모 등 주요 의병지도부가 모여 심각한 논쟁을 벌였는데, 중재를 통해 겨우 진정되었다는 것이다. 아마도 이 모임에서 일본의 대규모 군사작전에 대한 대처방안이 논의된 듯하다. 이들은 그 대응책을 놓고 투쟁 및 해산 주장이 팽팽히 맞서 끝내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한 것 같다. 결국 안규홍 의진은 두 개로 분열되었음을 다음의 기록을 통해 짐작할 수 있다. 359) 全基泓, 『海山倡義錄』 권 1, 「湖南同義團」 참조. 360) 『統監府文書』 6(국사편찬위원회, 1999), 65쪽 참조. 361) 『편책』, 『독운사』 14, 581-584쪽 참조. 당시 변장정찰대 1개 부대는 日 韓人 순사와 밀정 등 8명으로 편성되었다. 362) 『폭도사』, 130-133쪽 및 『자료집』 별집 1, 121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