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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2 민주장정 100년, 광주·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만 소실되어 분명하지 않다. 적은 보병총 1, 기병총 4, 탄약 1천발을 소유함. 우리 부상자 4명은 아래 와 같음(『진중일지』 Ⅱ, 484쪽). 진산전투에서 안규홍 의진은 24명이나 전사하는 등 상당한 피해를 입었지만, 일본측 피해도 적지 않았다. 일본 수비대는 오전 6시20분부터 11시까지 무려 4시간이상 치열한 전투를 벌인 것이다. 이 과정에서 일본군이 먼저 마을을 방화함으로써 온 마을이 소실되고 말았다. 진산전투에서 일본측의 소모탄이 753발이나 되었던 점만 보더라도 당시 상황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전투에서 일본측은 4명 중상, 1명 경상의 피해를 입었다. 당시 일본측이 작성한 보고서에는 “복내장 부근의 인민은 의병이라 칭하며 폭도(의병-저자주)를 숭경하고, 군수의 명을 받지 않고 적괴(의병장-저자주)의 명령을 준수하는 풍”이 있다고 파악할 정도로 의병과 주민들의 관계가 돈독했음을 인정하고 있다. 당시 일본측이 파악한 안규홍 의병장에 대해서는 흥미로운 내용이 들어있다. <적괴 안에 관한 조사> 1. 안은 보성군 봉덕면 법화리의 출신으로, 안진사라고 자칭하며, 본년 32세 단신으로 글자를 전혀 모름. 성품이 호방하고 담대하며, 과감한 것으로 중망을 특히 얻었다. 근래 기 병과 헌병에 대해 10수차례 저격하는 전법이 주효했는데, 복내장 기병대를 습격하여 소각함으로써, 복내장 기병대는 장흥으로 철수하였다. 이 지방 사람들은 그를 공포와 崇敬의 대상으로 가슴에 품고 있어서 군수의 명령은 듣지 않아도 안의 명령을 준수하기에 이르렀다. 한편에서는 그가 자부심을 높 이고 보병으로써 기병 헌병과 동일시(하는 전과를 올렸다). 즐겨 쓰는 수단으로 복병이나 저격에 의 해 우리 총기의 탈취를 기도하다가 드디어 패전에 이르렀다(『진중일지』 Ⅱ, 602쪽). 일본측도 안규홍 의진의 대담무쌍한 반일투쟁과 그의 성품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 보성지역의 주민들은 그를 숭배와 공경의 대상으로 인식한다는 것이다. 더욱이 그들이 군수의 명령은 듣지 않아도 안규홍 의병장의 명령은 따를 정도로 두터운 신임을 얻으며 그가 활동했음을 알 수 있다. 주민들의 적극적 지지를 얻으며 이들은 과감하면서도 다양하게 일본군경을 공격하였다. 정면공격을 감행하기도 하고, 때로는 지형지물을 이용하여 기습 공격하거나, 혹은 유인하여 요격하기도 하였다. 즉 화력과 전투력이 압도적인 일본군에 대항하기 위해 이들은 지리적인 이점을 최대한 이용한 것이다. 이들은 일본 군경의 상황과 전투형태에 맞추어서 적절한 규모의 의병-적게는 수십명에서 많게는 수백명--을 동원하였다. 그리고 1908년 음력 12월말에는 조상에 대한 차례와 혹한을 피하기 위해 일시적으로 부대를 해산하기도 하였다. 354) 이는 확고한 지휘체계와 군기가 엄히 유지되었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354) 『노월헌유고』 제4책, 「종제재보행록」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