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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말의병 281 9.18-9 복내 임재문 등 65명 투항 9. 25 봉덕, 법화 안규홍·염재보 등 의병 수뇌부 체포 10. 13 복내, 묵석산 유생의병 임창모 등 7명 사망 위에서 알 수 있듯이, 이들은은 1908년 4월부터 1909년 10월까지 반일투쟁으로 시종일관하였다. 이들의 반일투쟁은 대체로 보성을 비롯한 전라남도 동부지역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352) 특히 보성을 중심으로 적극적인 반일투쟁을 전개했은데, 이곳이 안규홍을 비롯한 대다수 의병들의 출신지였으므로 주민들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이들이 최초로 의병을 일으킨 동소산, 일본군의 기습을 받아 크게 패한 서봉산, 그리고 재기한 장소인 석호산도 모두 보성에 위치하고 있다. 따라서 이들의 반일투쟁은 주로 보성에서 이루어졌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안규홍 의진은 첫번째 전투를 승리로 이끌어 자신들의 존재를 과시할 기회로 삼고자 하였다. 첫 번째 전투가 바로 坡靑 전투였다. 당시의 상황을 일본측 자료는 다음과 같이 전해준다. 영산포헌병분대 보성분견소 전보의 보고에 의하면, (4월) 26일 오전 7시 낙안분견소와 교통을 위하여 파견한 坪井, 永戶, 永井의 상등병은 동 10시 보성의 동방 약 2리 반 부근에 달하려 할 때 부근 산상 에 적 약 150명을 발견하고, 이에 사격을 가하여 교전 약 2시간에 거의 휴대탄을 소진하고, 고전후 3 명 모두 부상, 드디어 평정 영호 2명은 그 자리에서 전사하고, 영정은 부상후 오후 2시에 간신히 귀소 하였다(『편책』, 『독운사』 10, 340-341쪽). 보성군 조성의 파청(일명 비둘기재)에서 이들이 일본헌병대를 크게 격파한 것이다. 일본 헌병 3명중 2명을 처단하고 1명이 부상당해 도주한 쾌거를 이룬 것이다. 이를 시작으로 이들은 며칠 뒤인 5월 1일 문전면 대원사에서 일본 순사대 10명과 치열한 접전을 벌였다. 대원사전투에서도 이들은 일본인 순사 2명에게 중상을 입혔다. 353) 1908년 8월 하순에는 보성 복내면 진산에서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다. 三. (8월 28일) 오후 11시 도착 진주수비1구사령관 길전소좌 전보 보고. 오후 10시 晉州局發. 진산에서 24일 오전 6시40분부터 정오까지 이학사, 안심(안규홍: 필자주), 김모가 이끄는 약 170명 의 적과 전투하여 9시30분부터 기병대의 來援에 의해 적 후방으로부터 화력을 집중하여 온 마을이 불탔다. 전투를 마친 후 전장에 유기된 사체는 24, 포로 1, 화승총 16, 촌락내의 사체는 그보다 많지 352) 김정명 편, 「조선독립운동』 1, 72쪽 참조. 353) 『편책』, 『독운사』 10, 50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