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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말의병 279 다”고 하였다(『담산실기』, 「副將廉在輔行錄). 이들은 본래 농민들로서 비록 상하의 지시나 도움을 받은 바 없지만, 원수를 갚아 나라를 사랑하고 백성들을 구제하기 위하여 죽음을 무릅쓰고 의병을 일으켰다는 것이다. 생명을 잃을지라도 국가를 보존해야 한다는 농민의병의 거의목표를 분명하게 천명하였다. 또한 이들은 오직 일본세력의 퇴치만으로는 국가를 보존할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이들은 먼저 갖가지 명목으로 파견된 관리들의 탐학을 근절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일본세력을 불러들이는 친일파들을 제거하기로 하였다. 끝으로 외국침략자, 즉 일본인들을 처단하기로 하였다. 요컨대, 이들의 활동 방향은 크게 세 가지로 압축되는데, 첫째 탐학한 관리의 근절, 둘째 친일세력의 제거, 셋째 일본인 처단 등이 그것이다. 이로써 볼 때, 이들은 탐관오리의 가렴주구와 친일세력의 활동 역시 일본세력의 침투와 마찬가지로 국가의 근본을 위태롭게 한다고 판단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들은 의병의 민간인 침탈행위를 일체 금지시켰다. 다시 말해 군율을 엄격히 시행하여 주민의 보호에 앞장선 것이다. 그의 이러한 방침은 당시의 일제측 자료에도 잘 나타나 있으며, 351) 당시 신문에서도 확인된다. 전라남도 통신을 의거한즉 보성군에 사는 담사리라 하는 안모가 의병을 많이 모집하여 그 고을안 에 두류하나 백성에게는 침범하는 일이 추호도 없다더라(대한매일신보 1909년 5월 20일자 「남도의 병」). 이들은 고향인 보성을 주무대로 활동하면서 주민들에게 전혀 폐를 끼치지 않으려 하였다. 그리하여 이들은 주민들의 지원과 신망을 얻을 수 있었다. 이러한 사실은 일본측 자료를 통해 확인된다. 안규홍 임창모만이 보성의 험한 산속에 숨어 전과 다름없이 서로 호응하여 세력을 폈다. 그런데 이곳 은 安의 출신지이기 때문에 주민들 가운데 배일사상을 가지고 있는 자가 극히 많고 도리어 安 등에게 동정을 하는 자가 있어 토벌의 효과가 적어 그들의 날뜀에 맡기는 수밖에 없다(『폭도사』, 18쪽). 보성이 안규홍 의병장의 출신지인데다, 또 주민들도 배일사상을 가진 자가 많아 의병들에게 동정하는 자들이 많다는 것이다. 이들이 주민들을 보호하고 민폐를 자행하지 않았기 때문에 주민들도 이들을 적극 비호하거나 지원했을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면 안규홍 의진의 재원은 어떻게 확보하였을까. 안규홍을 비롯한 대부분의 의병들이 이렇다 351) 김정명 편, 『조선독립운동』Ⅰ, 8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