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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민주장정 100년, 광주·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석권하였다. 당시 중앙 정부에서는 농민군을 진압하기 위하여 洪啓薰을 兩湖招討使로 임명하여 京軍 800명을 파견하였다. 당시 경군은 최정예부대로서 신식 장총과 쿠르프식 야포, 기관포 등으로 무장되어 있었으나, 전주에 도착하는 동안 절반 가량이 도망하였으며, 홍계훈 역시 소심하고 무능하여 군사활동 면에서 농민군에 끌려 다니는 형편이었다. 그는 5월말 장성의 황룡촌에서 농민군에 크게 패한 이후 정부에 淸兵借兵 요청을 되풀이할 뿐이었다. 24) 자신을 얻은 전봉준 등의 농민군 지도부는 전라관찰사 金文鉉에게 轉運使와 均田使의 혁파·탐관오리의 징계 등 폐정개혁안을 요구하였다. 드디어 농민군은 5월 31일 전주성을 점령하였다. 농민군이 백산에서 집결하여 본격적인 항쟁에 나선지 약 한달만에 전라도의 首府인 전주를 함락시킨 것이다. 이 소식에 가장 당황한 세력은 조선 왕실과 중앙 정부였다. 결국 청나라에 군대의 파견을 요청하였으며, 청국은 6월 초 군함 2척과 2,500명의 군인을 조선에 파견하였으며, 일본 역시 곧바로 6,000여 명의 군대를 파견하였다. 바야흐로 조선의 내정문제가 청일양국의 국제문제로 비화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에 따라 농민군의 상황도 달라지게 되었다. 농민군은 보국안민을 목표로 봉기한 것일 뿐 결코 나라를 위태롭게 하려는 것은 아니었다. 정부 역시 외세, 특히 일본의 호전적인 활동이 부담되었다. 그리하여 정부에서 먼저 농민의 요구사항을 묻자, 전봉준 역시 30여 개조의 조건을 제출함으로써 이른바 전주화약이 성립되었다. 1894년 6월 11일의 일이다. 당시 농민군의 요구조건은 크게 정치와 경제 두 분야로 나누어지는데, 전자는 탐관오리의 숙청과 매관매직 행위의 근절이었다. 후자는 삼정의 문란을 시정하라는 것과 외국인의 상행위 금지와 미곡의 국외반출 금지 등이 주요한 조건이었다. 또한 전운사와 균전사의 혁파, 동학교조의 伸寃, 電報局의 혁파 등을 내세웠다. 25) 전주화약이 체결되자, 농민군은 각자의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런데 농민군이 휩쓸었던 지역은 치안과 행정이 거의 마비상태나 다름없었다. 이에 새로이 관찰사에 부임한 金鶴鎭은 전봉준에게 官民相和策을 협의하여 마침내 각 군마다 執綱所를 설치하기로 합의하였다. 26) 집강소의 총본부인 大都所는 전주에 두고 각군의 집강소에서는 치안을 담당함과 동시에 폐정개혁을 추진하기로 하였다. 27) 그리하여 집강소를 통한 개혁운동은 농민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으며 자리를 잡아갔다. 얼마 지나지 않은 8월 초순경 전봉준 등 농민군 지도부는, 일본군이 경복궁을 침범하여 친일정권을 수립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이른바 ‘갑오변란’의 심각성을 깨달은 전봉준 등은 전라감사 김학진의 협조를 얻어 일본군을 몰아내기 위한 재기포 준비에 돌입하였다. 전봉준 등 농민군 지도부는 내정개혁을 명분삼아 국내에 주둔하는 일본군이 장차 조선을 병탄하려는 것으로 24) 이광린·신용하 편, 앞의 책, 131쪽. 25) 위의 책, 136∼139쪽. 26) 『동학란기록』 상, 64∼65쪽. 27) 이광린·신용하 편, 앞의 책, 14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