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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6 민주장정 100년, 광주·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이때 서울의 吳周一이란 자가 孫吳의 병법에 다소 통하였는데, 남에게 구속받지 않겠다는 뜻을 품 고 소년 수십 인을 거느리고 보성에 왔다가 공을 만나 말하기를, “일을 하자면 반드시 맹주가 있 어야 한다”하고서 공을 따랐다. 이리하여 전후에 걸쳐 일을 계획한 것 가운데 많은 부분이 그의 지도에서 나왔었다(『담산실기』, 「전」). 서울에서 내려온 오주일이 수십명을 이끌고 안규홍 휘하에 들어왔다는 것이다. 특히 오주일은 병법에 밝은 전략가로서 크게 활동하였음을 알 수 있다. 아마도 오주일은 해산군인으로 추정되는데, 그가 서울에서 내려와 1908년 4월경에 합류하였고, 또 병법에 밝았다는 사실 등으로 미루어 보아 그러하다. 이상과 같이, 안규홍 의진은 보성 출신의 머슴과 빈농을 근간으로 하여, 인근 지방의 농어민 그리고 강원도 의병과 해산군인 등으로 확대 ·개편되었다. 그리하여 이들은 항일투쟁에 유리한 조건을 두루 갖추게 되었다. 즉, 토착농어민 출신의 의병들은 지리에 밝고, 그 지역 주민들과 일정한 연고를 맺고 있었다. 그리고 강원도 의병들은 전투 경험이 풍부하였으며, 오주일 등은 전략 전술의 이론과 실제를 갖추었기 때문이다. 이로써 안규홍의 이른바 ‘담사리의병’ 345) 은 1908년 음력 3월 경 그가 머슴살이하던 법화 마을 가까이에 위치한 桐巢山에서 정식으로 출범하였다. 당시 안규홍은 의진의 조직을 새롭게 정비했는데, 보성출신을 중심으로 주요 인물들을 간략히 표로 작성하였다. <표> 안규홍 의진의 주요 구성원 성명 (별칭) 연령 (1909) 신분 직책 의병활동기간 해산후거취 비 고 안규홍 (기언) 30 머슴 (담사리) 의병장 1908. 1-1909. 9 체포(9.25) 사형 (1910.6.22) 염재보 (인서) 41 농민 부대장 1908. 1-1909. 9 체포(9.25) 사형 (1910.7.18) 오주일 해산군인 참모 1908. 4 - ? 수십명과 함께 가담 손덕호 (덕오) 43 농민 부장 · - 1909. 9 ·(9.25) 사형 (1910.7.18) 정기찬 30 · 부장·포군습장 · -· ·(9.25) 사형 (1910.7.18) 임하중 39 · 도십장 1909. 2 -· 체포(9.18) 사형(1910.7.29) 윤영채 (효원) 23 · 부장 1908. 1-1908. 5 대원사전투 전사 345) 趙熙濟, 『念齋野錄』 乾, 「安濟元」(필사본, 1934). 당시에도 이들을 ‘담사리파’로 불렀다(大韓每日申報 1909년 1월 9일자 「담사리派」, 5월 20일자 「담사리擧義」 등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