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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4 민주장정 100년, 광주·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활동에서 고무받은 바가 적지 않았겠지만, 그의 강직성과 의협심도 크게 작용하였으리라 믿어진다. 비록 그가 20여 년간 머슴살이를 하는 처지였지만, 그에게도 국가를 걱정하는 마음이 있었으리라 믿어진다. 예컨대, 당시 고용살이하는 사람들도 국가를 위해 동맹을 맺는 경우가 종종 발견된다. 즉, 충북 영동의 고용살이하는 사람들이 국채보상운동에 적극 참여하자고 결의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339) 3-2) 안규홍 의병부대의 결성 1907년 후반에 이르러 전라도를 비롯한 전국 각지에서 항일의병이 들불처럼 일어났다. 그러자 일제는 의병을 막기하기 위해 군경과 친일단체인 일진회를 동원하여 自衛團을 결성하였다. 즉, 일제는 1907년 11월부터 이듬해 2월까지 전국의 면단위까지 약 2천개소의 자위단을 조직했는데, 그 중 전남에는 161곳에 자위단이 만들어졌다. 340) 안규홍이 머슴을 살고 있던 보성 법화마을에도 도적을 방비하기 위한 단체가 조직되었다. 이것이 자위단인지, 아니면 민간에서 조직한 防盜團인지는 섣불리 말하기는 어렵다. 규홍이 뜻을 품고 거사하고자 하였으나 자신의 인망이 낮아서 뜻을 펴지 못할 즈음에 도둑들이 무 리를 모아 마을에 횡행하자 장정 수백인을 모아 북을 치며 도둑을 방비하였다(『담산실기』, 「서전 후 우」). 위에서 알 수 있듯이, 마을의 장정들을 중심으로 도둑을 방어하기 위한 활동이 전개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일본측 자료에 의하면 안규홍이 1907년에 일진회원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단발을 했다는 것이다. 341) 당시 일제는 자위단을 편성하면서 의병과 구분하기 위해 단발을 강요했을 뿐만 아니라 일진회에 강제로 가입시켰다. 이러한 점으로 미루어 보면 안규홍이 활동한 단체는 자위단의 하나였을 것이다. 자위단에서 활동하던 그는 평소 마음속에 품어왔던 의병을 일으킬 결심을 밝혔다. 보성군 우산에 사는 안씨의 집에 머슴으로 있는 어떤 사람이 수십년을 부지런히 고용하면서도 삭 전을 받지 아니하고 매우 신실한 까닭에 주인이 사랑하며 근처 마을이 다 칭찬하더니 지난해 9월 경에 졸연히 주인을 하직하는지라 만류하여도 듣지 아니하고 가더니 근처에 있는 머슴군 100여 명을 모집하여 연설하여 말하기를, ‘우리가 남의 집의 고용이나 국민되기는 일빈인데 나라 일이 위급할 때를 당하여 농가에서 구차하게 살겠는가 말하고 의병을 창기하여 호남 남일파와 합세하 339) 大韓每日申報 1907년 4월 13일자 「雇傭同盟」. 340) 홍영기, 앞의 책, 331쪽. 341) 위와 같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