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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말의병 267 다음의 기록이 주목된다. (1909. 3) 25일 오후 9시 폭도 1백여 명이 여수군 율촌면 평촌리에서 여수재무서 주사 양명희 외 4명이 숙박한 집을 습격하여 주사 양 및 공전영수원 김문수를 살해하고 세금 2백 원, 백목면 15필 을 약탈하고, 지방위원 김봉은 외 3명에게 중상을 입히고 어디론가 가버렸다(『편책』, 『독운사』 13, 741쪽.). 의병들이 여수 율촌면에서 재무서원, 공전영수원 등을 처단했다는 것이다. 의병들이 세금을 거두는 자들을 응징했음을 알 수 있다. 아울러 거둔 세금을 징발하여 의병활동의 재원으로 사용함으로써 이중의 효과를 거둘 수 있었기 때문에 세무관리나 우편체송인을 자주 공격하였다. 면장이나 이장 등도 징세업무를 독려하였기 때문에 의병들의 표적이 되었음은 물론이다. 따라서 전남지역에서는 일본의 계획대로 세금이 징수되지 않았으며, 의병에게 세금을 빼앗기는 경우가 많았다. 한편, 이들은 주민들로부터 군수품을 강요하기도 하였다. 세금을 빼앗아 사용하기도 하였지만, 의병활동의 부족한 재원을 충당하기 위해 불가피하게 주민들로부터 군수품을 징발한 경우도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위에서 보았듯이, 1908년 후반부터 약 1년 동안 여수지역은 약 43회의 의병활동이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비록 독자적인 의병조직이 발견되지는 않지만 전라도에서 가장 늦은 시기까지 항일활동을 전개한 것으로 파악된다. 그런데 이들은 일본 군경과 맞닥뜨려 교전할 경우에 상당한 피해를 입었다. 의병의 열악한 무기체계와 군사훈련을 받지 않은 민간인들로 구성되었다는 점에서 의병의 피해는 불가피하였을 것이다. 특히, 1909년 9월부터 전라남도에서 실시된 이른바 ‘남한폭도대토벌작전’(1909. 9 10) 기간에 의병의 피해가 집중적으로 발생하였다. 전남지역에서 활동하는 의병을 섬멸하기 위해 일본 군경의 대규모 군사작전이 집중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면 여수 출신이거나 여수에서 활동한 의병장과 일반 의병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이들에 대한 기록이 대부분 단편적이어서 체계적으로 이해하기는 곤란한 형편이다. 아래 [표]에 제시된 의병장들의 활동은 일본측 기록을 통하여 어느 정도 확인할 수 있다. 현재 15명 정도가 파악되는데, 그중 돌산을 포함한 여수 출신은 5명이다. 나머지 의병들은 고흥 보성 순천 등 대부분 전남 동부지역 출신들이 많다. 이들은 1909년 9 10월에 실시된 이른바 ‘남한폭도대토벌작전’을 전후한 시기까지 활동하였다. 다시 말해 이들은 일제에 끝까지 저항하였던 것이다. [표] 여수에서 활동한 의병의 주요 구성원 이름(연령) 출신지(직업) 소속 활동 시기 비고 안규홍(30) 전남 보성(머슴) 의병장 1908~1909 체포 강승우 전남 순천? 의병장 1909 조규하의 副將 강형오와 동일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