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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말의병 265 미상 1909.8.29 여수군 율촌면/순사대 의병 1명 전사 미상(13) 1909.8.30 여수군 삼일면/ 출현 미상(수십) 1909.9.3 여수군 삼일면/수비대 의병 10명 사상 강승우(4) 1909.9.17 여수군 율촌면/주민 군수강요 및 납치살해 강승우(10) 1909.9.20 여수군 율촌면/정찰대 작전으로 잠복중 체포 김경윤(38) 1909.9.18 여수군 화양면/수비대 의병 20여 명 사상 강승우(30) 1909.9.28 여수군 율촌면/수비대 의병 10여 명 사상 김경윤(수십) 1909.9.26 여수군 화양면/수비대 김경윤 등 체포, 자수 김아무개 1909.9월하순 여수군/수비대 고흥출신 김모 전사 미상(20) 1909.10.8 여수/수비대 의병 9명 전사 미상(100) 1909.10.21 여수군 원포/수비대 의병 28명 전사 조아무개(13) 1909.10.31 여수군 율촌면/수비대 미상(15) 1909.11.17 여수군 달천/순사대 의병 1 전사, 2체포 조병현(15) 1909.11.17 여수군 죽곡/수비대 의병 5 전사, 1 체포 미상(16) 1909.12.2 여수군 임안면/ 출현 미상(5) 1909.12.9 여수군 거금도/경비대 의병 5명 체포 미상(30) 1909.12.25 돌산군 읍내/주재소 순사주재소 공격 위의 [표]에서 알 수 있듯이, 여수에서 활동한 의병들은 대체로 적게는 10명에서 많게는 40명 등 수십 명을 단위로 대일항쟁을 전개하였다. 이와 같이 소규모 부대를 운용한 이유는 유격투쟁에 유리할 뿐만 아니라 일본군경의 활동을 분산하는 데에도 도움이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반일활동이 주로 이루어진 지역은 예전의 돌산군의 여러 섬과 여수 인근의 해안, 그리고 순천과 가까운 율촌면 등으로 나타난다. 이들 주된 공격 대상으로는 일본 군경, 순사주재소, 재무서뿐만 아니라 일본 어부들이 많았다. 그들이 일본 침략의 첨병에 해당하였기 때문이다. 특히, 한국에 이민을 온 일본 어부들은 이들이 활동하는 도서 지역 주민의 생존권과 직결되는 문제였다. 한국인 어부들과 어장의 침탈, 근대적인 어선과 어구의 사용에 의한 높은 어획량 등으로 인해 마찰이 잦았기 때문이다. 1908년 11월 漁業法이 시행되었다. 이로 말미암아 연해 도서지역 어민들은 생계의 위협에 직면하였다. 어업법의 시행으로 일본인들의 어업권 장악이 급증했기 때문이다. 325) 예컨대, 1909년 325) 대한매일신보 1909년 4월 22일자 「어업법 시행에 대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