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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2 민주장정 100년, 광주·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지역민들은 독립에 대한 열망을 결코 잊지 않았다. 나아가 이러한 움직임이 趙擎韓(1900-1993)과 같은 걸출한 독립운동가를 성장시킨 기반이 되었으리라 생각한다. (2) 여수의 의병항쟁 2-1) 여수의병의 주도인물과 활동 여수에 항일의병의 발길이 본격화된 것은 1906년 중반 무렵으로 보인다. 320) 1906년 6월, 최익현은 전 낙안군수 林炳瓚과 함께 전북 태인의 武城書院에서 수백 명을 모아 의병을 일으켰다. 태인의병이 일어나기 직전에 유포된 통문이 『황성신문』 1906년 4월 5일자에 실려 있다. 병가승패는 强弱利鈍에 있지 않고, 오직 지략과 용맹을 갖춘 장군이 충의의 군대를 통솔하고 一心同 力한즉 가히 대사를 도모하나니 (중략) 군율 衣制 器械 規例 등 여러 조항은 나중에 통문을 내겠노라. 그리고 모임 장소와 일자는 계속 알릴 터이니 모두 예비해서 통문을 기다리되 게으르거나 촐랑대지 말고 후회할 죄를 범하지 않으면 천만 다행이겠노라. 發通人은 전남 興島에 거주하는 張濟世 趙安國 裴應天 등 (중략) 이 통문은 市都에 도착하는 즉시 鄕廳에 바칠 것이라 하였더라. 위의 인용문은 전북관찰사 韓鎭昌이 內部에 보고한 것을 『황성신문』에서 게재한 것이다. 321) 의병에 가담할 것과 무엇을 준비해야 하며 언제 어디로 집결해야 할 것인가를 통문으로 계속 전하겠다는 내용이다. 이 글은 음력 3월 1일 밤 김제읍 근처의 상점 벽에 게시되어 있었다. 각 군의 鄕長과 首書記 및 주민들에게 보낸 것으로, 鄕廳을 중심으로 전달되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주목되는 사실은 유생들이 주도한 의진임에도 불구하고 군율 의제 기계 규례 등을 매우 구체적으로 제시한 점이다. 예를 들면 당시 태인의병의 지도부는 군율의 경우 군사 비밀을 누설한 자, 겁을 먹고 후퇴하는 자, 부녀를 겁간하는 자 등은 斬首한다고 명시하였다. 또한 복장은 모일 때 패랭이(平凉子)와 넓은 소매의 두루마기를 착용하되, 전투복 상의는 황색, 戰帶는 청색, 수건은 홍색으로 염색해서 가져올 것을 지시하였다. 그리고 무기는 창이나 칼 활 등을 각자 지참할 것과 배낭 1개, 군량은 각자 2되와 취사도구를 갖추라고 하였다. 심지어 상호간의 軍號를 정하여 비밀의 유지에 만전을 기하였다. 322) 이처럼 의병 가담자에 대한 구체적인 지침이 전달되었다는 점에서 주목되는 것이다. 320) 한말 여수지역 의병항쟁을 본격적으로 다룬 글은 홍영기, 「1900년대 일제의 침탈과 여수의병의 활동」(『여수항일운 동사』, 여수시, 2006)이 거의 유일하다. 이 글은 그것을 『여수시사』 편집방침에 맞추어 다소 수정하여 게재했기에 따로 각주를 달지 않았음을 밝힌다. 321) 임병찬의 『의병항쟁일기』(한국인문과학원, 1986), 45 46쪽에도 같은 내용이 순한문으로 기록되어 있다. 322) 위의 책, 「창의일기」, 20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