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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말의병 261 姜炯吾(일명 姜勝宇 · 姜震遠, 1881-1921)가 의병부대를 이끌고 1909년 중반까지 활동하다가 병을 얻어 잠복하였다. 그 후에는 선봉장 崔性裁(1873-1909)가 잔여 의병을 통솔하다가 순천시 서면에서 일본군에 패하여 경남 남해로 잠복하였다. 최성재는 8월에 다시 육지로 나와 구례군 소의면의 지리산 자락에 은둔하려다가 발각되었다. 그는 광주로 호송도중 탈출하려다가 일본군에 총살되고 말았다. 312) 선봉장 최성재가 붙잡혀 희생된 후에 강형오가 활동을 재개한 것 같다. 그는 여수 지역까지 활동반경을 넓혔으며, 1909년 9월부터 두 달간 실시된 일제의 야만적인 의병진압작전을 무사히 피한 의병장으로 기록되어 있다. 313) 그는 1909년 8월에 일제의 폭압적인 군사작전을 피해 남해의 연내도로 들어갔다가 활동을 재개한 것으로 보인다. 그후 그는 외가인 쌍암의 오성산 동굴에 은신하였다. 10여 년 동안 제자들의 도움을 받아 잠복해 있던 그는 1921년 8월에 발각, 체포되었다. 314) 그는 비밀을 지키기 위하여 옥중에서 스스로 혀를 물고 자결한 것으로 전해진다. 요컨대, 강형오 의병부대는 일제에 굴복하지 않고 끝까지 저항하였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일제는 전라도 의병을 진압하기 위해 1909년 9월부터 두달동안 이른바 남한폭도대토벌 작전을 실시하였다. 그 결과 다수의 의병장을 비롯하여 약 500명이 전사하였고, 약 2,000명이 붙잡혔다. 순천지역에서도 1909년 9월 25일과 29일, 의병장 趙敬(부하 16명)과 朴東(부하 25명)가 각각 체포되었다. 315) 10월 15일에는 상사면 출신의 吳龍基, 316) 10월 31일에는 張基元 이하 21명, 11월 7일에는 張聖心 이하 9명, 317) 이어 8일에는 趙昌國, 318) 등이 각각 자수하였다. 그 후에도 의병장 趙泰植과 그 부하 廉必甲 등 3명이 11월 25일에 체포되었다. 이처럼 순천을 비롯한 전남 동부지역의 의병들은 끝까지 저항하면서 상당한 피해를 입었다. 하지만, 엄청난 타격을 받았음에도 전남지역 의병들은 독립을 향한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즉, 1906년 최익현과 함께 의병을 일으킨 바 있던 林炳瓚(1851-1916)은 獨立義軍府의 결성을 주도하였다. 독립의군부는 고종의 밀지를 받아 1912년부터 추진되었는데, 군사조직을 축으로 하는 국내에서 가장 치밀한 대규모의 비밀독립단체였다. 여기에는 의병 출신들이 대거 참여하였는데, 특히 전라도 사람들이 많았다. 그 가운데 순천지역 출신들을 꼽아보면 다음과 같다. 趙璣燮 金鍾胄 金承濟 朴海燮 裴泳柱 徐仁錫 李炳强 宣永培 등이 그들이다. 이들은 독립의군부의 군 대표 302명에 포함되어 있다. 319) 비록 1914년에 발각되었지만, 일제에 끊임없이 저항하는 모습을 보여준 것이다. 다시 말해, 순천 312) 『편책』, 『독운사』 15, 495쪽. 313) 위의 책, 826쪽. 314) 『동아일보』와 『조선일보』 1921년 8월 31일자 ; 『강진원 의병장 약전』(이하 『약전』), 29 163-168쪽 참조. 315) 『편책』, 『독운사』 19, 663쪽. 316) 『편책』, 『독운사』 15, 793쪽. 317) 『편책』, 『독운사』 16, 103 114쪽. 318) 『편책』, 『독운사』 19, 666쪽. 319) 임병찬, 『義兵抗爭日記』(한국인문과학원, 1986), 242-24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