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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 민주장정 100년, 광주·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이상에서 살펴보았듯이, 도서지역 의병부대에 대한 일본측의 대응은 의병활동의 정도에 따라 변화되었다. 이 지역의 활발한 의병활동은 일제의 경제적 침탈을 크게 저해함으로써, ‘작전’이라는 대규모 군사작전을 초래케 하는 近因의 하나가 되었다. 그러나 연해-도서지역 의병부대를 주도하던 지도부는 노선다툼으로 말미암아 일제의 군사작전에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측은 수많은 도서를 포함하고 있는 이 지역에서 의병이 재발되었을 경우에 대비하여 세심한 조치를 취하였다. 警備船의 운영과 해남-하동간 도로공사가 그것이다. 이는 전라남도를 ‘유수한 산업지’로 평가한 日帝의 저의가 드러난 조치라 할 수 있다. 결국, 호남 지방의 의병을 진압함으로써 일본측은 경제적 침탈의 가속화와 병탄의 기반을 확보한 것이다. 5. 전남 동부지역의 의병항쟁 전남 동부지역의 의병봉기는 다소 늦게 시작되었다. 을사조약 이후에 태동한 것으로 보이는데, 백낙구 의병부대가 동부지역 최초의 의병항쟁을 전개한 바 있었다. 하지만 후기의병 시기에는 매우 강력하고 장기간 반일투쟁을 주도하였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동부지역의 중심지인 순천에서는 안규홍과 조규하 강형오 의병부대가 두각을 나타내었고, 백운산을 끼고 있는 광양에서는 황병학 의병부대, 그리고 보성에서는 안규홍 의병부대로 대표된다. 따라서 여기서는 이들의 활약상을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아울러 여수의 경우에는 독자적인 의병항쟁보다는 인근 지역의 의병부대가 여수에서 활동하는 상황이 포착되므로 그러한 내용을 중심으로 서술하고자 한다. (1) 순천의 의병항쟁 순천의 의병항쟁은 조계산을 근거지삼아 전개되었다. 당시 일제측은, 송광사와 선암사가 자리한 조계산에는 의병의 출몰이 잦으며, 지형적인 조건에 의하여 의병을 진압하기 어렵다고 파악할 정도였다. 309) 조계산을 의병의 근거지로 이용한 대표적인 의병장으로는 보성출신의 안규홍, 순천출신의 강진원과 조규하 등을 들 수 있다. 안규홍은 흔히 ‘안담사리’라 불려졌는데, 전남 동부지역을 휩쓴 전설적인 의병장이었다. 310) 안담사리 의병부대에 대해서는 따로 서술할 것이므로, 여기서는 순천 출신 의병장이 이끄는 의진에 대해 서술하고자 한다. 趙奎夏(1877-1908) 의병부대는 규모가 크지는 않았으나 일제와 끈질긴 투쟁을 벌였다. 조규하는 순천시 송광면 대곡리 출신으로, 임실군수에 재임하던 중에 을사조약의 체결 소식을 들었다. 그는 번민 끝에 관직에서 물러나 최익현의 의병봉기에 가담하였다가 실패를 맛보았다. 고향에 돌아온 그는 1908년 초에 직접 의병을 일으켰다. 그는 순천과 곡성 등지에서 활동하다가 구례수비대 및 순사대와 곡성군 목사동면 평지동에서 교전하다가 전사하였다. 311) 이후 부대장이었던 서면의 훈장 출신 309) 『편책』, 『독운사』 9, 213쪽. 310) 홍영기, 『대한제국기 호남의병 연구』, 제2부 제4절 참조. 311) 『폭도사』, 6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