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1page

한말의병 259 발생하였다. 300) 그 결과, 황준성은 ‘작전’을 피해 보성 순천 등지로 이동하였으며, 301) 추기엽은 대둔사 패전의 책임을 묻는 부하들에게 피살되었다. 302) 그리고 주요 인물가운데 유일한 해남출신이었던 황두일은 ‘작전’ 실시 직전에 일부의 부하와 같이 자수하였는데, 뒤를 이어 그의 부하들이 대거 자수한 듯하다. 303) 즉, 해남지역에서는 황두일 이하 백 수십 명이 자수함으로써, 그 공로로 일본군 제2연대 제 60중대는 ‘작전’ 후 포상받은 3개 중대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304) 그리고 내륙으로 이동했던 황준성 등은 ‘작전’을 피해 이리저리 옮겨 다니다가 결국 완도에 다시 들어와 잠복 중 1909년 12월에 자수하였다. 305) 다만 주도인물가운데 강성택만이 유일하게 체포를 면하였던 것 같다. 요컨대, 일본측의 대규모 군사작전과 경비선의 배치로 말미암아 완도 해남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연해-도서지역 의병들은 내륙으로 이동하여 전열을 정비하고 진로를 의논하였다. 그러나 진로 문제로 지도부가 분열된 와중에서 일본측의 불의의 기습을 받아 상당한 인명 손실을 입었다. 결국, 주도 인물을 포함한 연해-도서지역 의병의 대다수는 ‘대토벌작전’의 종료와 함께 피살 혹은 자수, 피체되는 운명에 처하였던 것이다. 일본측은 대규모 군사작전을 끝낸 직후에 연해-도서지역을 염두에 둔 조치를 취하였다. 첫번째 조치로는 총 16척의 경비선 가운데 10척을 목포와 여수에 각각 배치, 운영하였다. 이 경비선들은 아직도 도서지역에 잠복·활동 중인 의병들을 색출하고, 내륙과 도서지역을 효과적으로 차단함으로써 의병의 이동을 막기 위한 목적으로 운영되었다. 306) 이러한 과정에서 30명이 피체되었는데, 그중 의병관련자가 24명이나 되었다. 307) 그리하여 도서지역의 불안이 해소되자, 일본 어민의 수가 수 배나 증가하고 안전한 선박 운행 그리고 徵稅上에도 상당한 효과를 거두었다고 한다. 308) 간단히 말해서 일제의 경비선 운영은 도서지역의 의병을 종식시켜 그들의 경제적 침탈을 원활히 하고, 나아가 그것을 더욱 가속화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300) 위의 책, 920-924쪽과 『편책』, 『독운사』 15, 86-87쪽 그리고 「토벌지」, 『자료집』 3, 803쪽 참조. 그런데 도서지 역 의병들의 진로를 놓고 황준성은 해산을, 추기엽은 계속 투쟁을 주장한 듯하다(『자료집』 별집 1, 923-924쪽). 한편, 이들은 당시 일본군의 기습을 받아 전사 24명, 피체 10명이라는 인명 손실을 입었다. 301) 『편책』, 『독운사』 15, 493-4·545쪽. 302) 『편책』, 『독운사』 15, 135쪽과 『폭도사』, 127쪽. 303) 『편책』, 『독운사』 15, 334-335쪽과 493-494쪽 그리고 『독운사』 1, 788-789쪽 및 金義煥, 「1909年의 抗日義兵 部隊의 抗戰」, 『民族文化論叢』 8, 238쪽. 304) 『편책』, 『독운사』 1, 827쪽. 305) 『편책』, 『독운사』 16, 358-360쪽과 『자료집』 별집 1, 920-922쪽 참조. 그런데 황준성의 자수 날짜에 대하여 『편 책』에는 10월 29일로, 별집 1의 재판기록에서는 12월 7일로 각각 다르게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는 재판기록을 따 른다. 306) 「『편책』, 『독운사』 1, 870-872쪽. 307) 위의 책, 872쪽. ‘작전’이 끝난 1909년 11월과 12월에도 의병과 경비선 간에 여러 차례의 교전이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大韓每日申報 1909년 11월 21일자 「全南義兵」과 12월 4일자 「警備船消息」). 308) 『편책』, 『독운사』 1, 872-87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