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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민주장정 100년, 광주·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위에서 알 수 있듯이, 농민군 지도부는 위로는 중앙의 공경대부로부터 아래로는 지방의 수령에 이르기까지 백성들을 제물로 삼아 가렴주구만을 일삼고 있음을 통렬하게 비판하고 있다. 전라도 각지에 포고문을 발송한 전봉준 등은 농민군을 이끌고 음력 3월 23일경 고부를 다시 점령한 후 부정부패에 시달려온 동학교도와 농민들을 고부의 白山에 집결시켰다. 이들의 부름에 호응하여 호남평야 너른 들판에 나홀로 봉긋 솟은 백산에 전라도 각지에서 수많은 농민들이 몰려왔다. 당시의 상황을 “서면 白山 앉으면 竹山”이란 말이 회자되었다. 즉 하얀 옷을 입은 농민들이 백산에 서있으니 온통 하얗게 보이고, 이들이 앉으면 각자 들고온 죽창들만 솟아 보이니 그렇게 말한 것이다. 전봉준 등은 백산에 모여든 1만여 명의 농민군을 재편성하여 湖南倡義大將所의 이름으로 격문을 발표하였다. 당시 전봉준은 총대장, 손화중·김개남은 總管領으로 추대되었는데, 이 때가 1894년 음력 3월 25일(양 4.30)이었다. 총대장 전봉준은 먼저 다음과 같은 농민군의 4대 강령을 선포하였다. 첫째, 사람을 죽이지 말고 재물을 손상하지 말 것 둘째, 충효를 다하여 제세안민할 것 셋째, 왜적을 축멸하여 聖道를 밝힐 것 넷째, 군대를 거느리고 서울에 들어가 권귀를 모두 죽일 것(鄭喬, 『大韓季年史』 上, 74쪽). 농민군 지도부가 표방한 이른바 4대강령에 잘 나타나 있듯이, 백산의 농민 봉기는 집권층에 대한 무력봉기로서 혁명적 성격이 매우 강하였다. 또한 전봉준은 ‘안으로 탐학한 관리의 머리를 베고 밖으로 횡포한 강적의 무리를 내쫓고자 함이다’라는 요지의 격문을 작성하여 사방에 전하여 일반 민중의 적극적인 호응을 요청하였다. 20) 아울러 동학농민군이 지켜야 할 기율을 정했는데, 아래와 같다. 항복한 자는 사랑으로 대한다 / 곤궁한 자는 구제한다 / 탐학한 자는 추방한다 / 순종한 자는 경복한 다 / 굶주린 자는 먹인다 / 간사하고 교활한 자는 없앤다 / 도주한 자는 쫓지 않는다 / 빈한한 자는 돕 는다 / 불충한 자는 제거한다 / 거역한 자는 효유한다 / 병든 자는 약을 준다 / 불효한 자는 죽인다 (『東匪討錄』, 『동학농민전쟁사료대계』 6, 176쪽). 21) 위의 12개조 기율에서 천명되어 있듯이, 농민군 지도부는 보편적 인도주의와 유교적 덕목을 표방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문서들은 전라도 각 군현에 빠짐없이 전달되었던 것 같다. 광주-전남 지역의 농민들과 동학 교인들이 곧바로 호응한 점에서 그러하다. 吳知泳의 『東學史』(초고본)에서는 20) 위의 책, 286쪽. 21) 같은 내용이 『주한일본공사관기록』 1, 19-20쪽에도 실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