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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4 민주장정 100년, 광주·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姜自仙 45 농업 황두일의 부하 해남 1909 피체 징역 3년 李鳳奇 24 농업 황두일의 부하 강진 1909 피체 징역 3년 朴春彦 33 황두일의 부하 해남 ?-1909. 8 자수 金公西 30 황두일의 부하 해남 ?-1909. 8 자수 崔京化 28 황두일의 부하 해남 ?-1909. 8 자수 朴京凡 29 황두일의 부하 해남 ?-1909. 8 자수 李得春 19 황두일의 侍從卒 해남 ?-1909. 8 자수 金順彦 27 황두일의 從事軍 해남 ?-1909. 8 자수 위의 <표>에서 볼 수 있듯이, 유배수를 제외한 의병들은 거의 도서 연안 출신들이다. 특히 주목되는 사실은 이들이 의병에 참여한 시기인데, 대부분 1909년 초에 집중되어 있다. 더욱이 이 시기는 <완도 삼림문제> 및 어업법의 시행과 거의 맞물려 있다. 다시 말해서 연해-도서 주민들은 일제의 경제적 침 탈로 인하여 자신들의 생계를 위협당하자, 의병에 가담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완도 해남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의병들은 심남일의 기군장인 이덕삼을 정점으로 한 체계를 유지하였다. 즉, 도서지방 의병들은 심남일 의병부대로부터 영향받은 바가 적지 않았다. 그 점을 단적 으로 나타낸 것은 바로 이 지역 의병부대를 주도한 초기의 중심인물이 이덕삼이었다는 사실이다. 하 지만, 그는 이들을 효과적으로 지휘한 것 같지 않다. 오히려 黃俊聖·黃斗一·秋琪燁·姜成宅 등에 의해 거의 독립적으로 활동한 듯하다. 277) 그리하여 1909년 봄이 지나면서 유배수들과 토착 주민들이 의병부대를 이끌어 갔다. 유배수 황준성 278) 을 중심으로 해남 출신 황두일 279) 및 유배수 추기엽 280) 강성 택 281) 등이 그들이다. 한편, 일반의병들은 대부분 농업과 어업에 종사하다가 일제의 경제적 침탈로 말 미암아 반일투쟁에 나선 연해-도서 주민들이었다. 결국 도서지역에서는 의병 출신 유배수들의 지도 력과 도서 지역 주민들의 적극적인 호응이 합쳐져서 의병봉기로 표출되었던 것이다. 277) 『편책』, 『독운사』 13, 727쪽 ; 같은 책 14, 441쪽 ; 같은 책 15, 141쪽 참조. 277) 활동지역 규모 성명 활동지역 규모 이덕삼 해남 종래 2-300, 今無 추기엽 우수영 부근 100 황두일 해남반도 일원 120 강성택 20 황준성 우수영 150 최운성 13 김성삼 20 / 278) 黃俊聖은 1907년 음력 4월에 전북 태인에 사는 崔益鉉의 門人 李起洙 등과 의병을 일으켰다가 체포되어 1908년 2 월에 완도에 유배되었다(『舊韓國官報』 1908년 2월 18일자 「司法」 및 같은 책 1908년 2월 24일자 「司法」 참조. 279) 黃斗一은 海南郡 北終面(現 北平面) 古達洞 출신으로 어느 정도 재산이 있었던 것 같다(『독운사』 1, 788-789쪽). 그래서인지 그의 부하들은 대부분 해남군 출신들이다(<표> 참조). 280) 추기엽은 全州鎭衛隊 軍人이었는데, 군대해산 이후 익산 출신의 의병장 尹賢甫 휘하에서 활동하다가 체포되어 완도 에 유배되었다(『舊韓國官報』 1908년 4월 7일자 「司法」 및 같은 책 1908년 5월 23일자). 그후 그는 1909년 2월 의 병에 다시 참여하여 완도 해남 등지에서 활동하다가, 1909년 7월 대흥사 전투의 책임을 물은 부하들에게 피살되었 다(『편책』, 『독운사』 15, 135쪽). 281) 강성택에 대해서는 잘 알 수 없다. 혹시 완도에 유배중 다시 의병에 가담한 姜西山과 동일인이 아닐까 한다(『편책』, 『독운사』 14, 62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