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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말의병 251 되었으리라 짐작된다. 이상에서 보았듯이, 전라남도 완도를 비롯한 연해-도서지역 주민들은 처음에는 의병관련 유배수들 과 일정한 접촉을 유지하거나, 내륙에서 섬으로 이동해온 의병들의 일시적 활동을 목격하는데 그쳤었 다. 그러던 중 1908년 말부터 <완도삼림문제>와 어업법의 시행으로 말미암아 바로 그들이 일제의 경 제적 침탈의 대상이 됨으로써 생계의 위협에 직면하였다. 그리하여 이들의 반일감정이 고조되었고, 나아가 생존권 수호의 차원에서 일본 어민들과 투쟁을 전개하기도 하였던 것이다. 결국 이와 같은 사 건들이 도서지역에서의 의병봉기에 중요한 계기가 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무렵 내륙에서 도서지 역으로 이동한 심남일 의병부대의 의병활동이 섬 주민들의 반일감정을 자극하여 의병에 가담시키는 동인으로 작용한 것으로 생각된다. 또한 이들의 의병투쟁은, 완도·진도 등에 유배되어 있던 의병출 신 유배수들이 의병에 재차 가담하는 데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여기에 소안도의 토지분쟁 사건도 일 조한 것으로 여겨진다. 이제까지 잠잠했던 도서지방에 1908년 말부터 의병활동이 빈번하게 나타나는 현상은 바로 앞에서 논의해온 사건들이 의병봉기에 직, 간접으로 관련되었음을 반영한 것이다. 2-2) 연해-도서의병의 주도인물과 활동 1908∼1909년 당시 전라남도의 내륙지방에서는 심남일·안규홍·전해산 등이 주도하는 의병부대 가 두드러진 활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267) 심남일은 전라남도의 남부지역, 안규홍은 동부지역에서 주 로 활동하였다. 268) 전해산은 대체로 서부 지역에서 활동하였다. 269) 이 가운데 심남일 의병부대는 1908 년 후반에 활동 영역을 해남까지 넓혔다. 270) 대한매일신보 1908년 11월 5일자 잡보 「의병굉장」난에 전라남도에서 온 사람의 말을 들은즉 해남 등지에 의병이 창궐하는데 그 의병의 당파는 남일파라 하고 세력이 굉장하다더라. 라고 하여, 南一派, 즉 심남일 의병부대가 해남에서 가장 강력하게 활동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또한 같은 신문 1909년 3월 23일자 잡보 「남일파의 긔세」난에도 영암과 해남 등군에는 의병 남일파의 기세가 점점 성하여 일인을 보는대로 죽이는 고로 그 지방에 는 일본 상인과 거류민이 모두 도망하였다더라 267) 『暴徒史』, 8-9쪽. 268) 沈南一과 安圭洪의 의병부대에 관한 독립적인 연구로는 아래의 논문들이 참고된다.· 홍영기, 「舊韓末 沈南一 義兵 의 組織과 그 活動」, 『七里 李光麟敎授 退職記念 韓國史論文集』 ; 『東亞硏究』 17(1989).·홍영기, 「安圭洪 義兵의 組織과 그 活動 -舊韓末 湖南義兵의 一例-」, 『韓國學報』 49(1987) ; 『義兵戰爭硏究』 上(1990).·姜吉遠, 「澹山 安 圭洪의 抗日鬪爭」, 『孫寶基博士 停年紀念 韓國史學論叢』(1988). 269) 全海山에 관한 대표적인 연구로는 姜吉遠, 「海山 全垂鏞의 抗日鬪爭」, 『歷史學報』 101, ; 『義兵戰爭硏究』 上(1990). 270) 「海南城內接戰」, 『沈南一實記』,『자료집』 2, 92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