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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8 민주장정 100년, 광주·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만원에 일본인에게 팔아넘기려는 데서 야기되었다. 송병준은 그가 농상공부 대신으로 있던 1907년 에 일본인에게 완도 삼림을 팔기로 미리 내정해 놓았다. 그후 1908년 말에 이르러 당시 農商工部 大 臣 趙重應과 함께 그것을 일본인에게 賣渡하려 하였던 것이다. 그러던 중 이 사건이 언론에 크게 보도 되었다. 이 소식에 가장 놀란 사람들은 물론 莞島 주민들로서, 그들은 즉각 반발하였다. 大韓每日申報 1908년 12월 22일자 「韓國森林의 賊」이란 論說에서, 近年 韓國의 餘存한 森林이 西道의 白馬山城과 南道의 莞島에 在한 森林뿐이더니 白馬山城의 森 林은 年前에 壹進會가 擅自發賣 (중략) 莞島森林으로 言하면 年前 加藤增雄이가 宮內府顧問으로 該森林을 調査한즉 百萬圓 價値로 論하던 것인데 現今 宋秉畯이가 日人 江藤과 何等 分利的 手段 으로 拾萬圓에 決價賣渡하였다 하니 吾제는 韓國森林의 厄運을 弔하며 兼하여 莞島人民의 厄運을 弔하노라 (중략) 況 莞島는 本土人民의 生活이 專혀 森林에 係한 바라. 此地는 小嶋라 良田도 少하 며 沃畓도 少하며 其他 金銀銅鐵 등의 採出이 無하고 六七千戶 人民이 只是 森林에 依하여 柴炭屋 材 등은 姑舍하고 穀粟도 此로 買入하며 絮布도 此로 買入하나니 萬壹 森林이 無하면 居民이 無할 지며 居民이 無하면 莞島가 無할지니 然則 莞島 壹郡은 森林으로 成立된 郡이어늘 莞島森林을 外 人에게 賣渡함은 즉 莞島 壹郡을 擧하여 外人에게 賣渡함이로다 (중략) 莞島의 餘望은 其人民이 死力을 出하여 此를 抗爭함에 在 라고 하여, <莞島森林問題>의 顚末 그리고 삼림에 全的으로 의존하여 살아가는 莞島住民의 실정 및 삼림 처분에 대한 莞島 주민의 반응을 상세히 언급하고 있다. 결국 莞島의 삼림은 당시 總理大臣 李完 用의 弄奸과 莞島住民의 반대 그리고 언론의 비판적 태도 등으로 인하여 일본인에게 讓渡되지는 않았 다. 251) 그러나 이것으로 莞島의 森林問題가 매듭지어진 것은 아니었다. 1909년 2월에는 莞島郡守 鄭肯朝 가 森林을 濫伐했다가 免職되었으며, 252) 그 해 5월에는 삼림 남벌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日本人 事務 囑託이 莞島에 파견되었다. 253) 이와 비슷한 시기에 원인모를 화재가 발생하여 莞島 森林은 거의 절반 이나 불에 탔는데, 피해 면적이 약 4천 町步에 이르고, 피해액도 수십만원에 달하였다고 한다. 254) 요 컨대, 莞島의 森林問題가 1908년 말에 제기된 이래 1909년 5월까지도 완전하게 해결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莞島 住民들은 日帝의 집요한 경제적 침탈을 직접 체험할 수 있었으 며, 그만큼 이들의 反日感情이 고조되어 갔던 것이다. 251) 共立新聞 1909년 2월 10일자 內報에서는 완도 삼림이 일본인에게 넘어가지 않게 된 내막을 자세히 언급하고 있다. 252) 皇城新聞 1909년 2월 18일자 雜報 「伐林免官」. 253) 大韓每日申報 1909년 5월 26일자 雜報 「莞島森林保護」. 254) 京鄕新聞 1909년 6월 11일자 잡보 「완도에 큰 화재」. 한편, 이때 발생한 화재를 우연한 사고나 失火로 돌리기에는 어쩐지 자연스럽지가 않다. 지금까지 논의한 내용으로 미루어 짐작하면 삼림문제와 관련된 고의적인 放火 가능성도 있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