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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6 민주장정 100년, 광주·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인 의병장인 심남일을 비롯한 전해산, 안규홍 등의 근거지를 찾아내는 것이었다. 240) 또한 7월 중순에 도 1개월 예정으로 11개 부대가 편성되었는데, 이들 역시 “주된 목적은 전해산 심남일을 죽이는데 있 다”라고 함으로써 241) 당시 일본측이 심남일의 제거에 얼마나 힘을 기울였는지를 잘 보여준다. 일본측은 의병을 완전히 진압하기 위해 새로운 방법을 모색하였다. 이른바 ‘南韓暴徒大討伐作戰’이 그것이다. 그러자 1909년 8월말 심남일 전해산 등 10여 명의 의병장이 강진군 모처에 모여 일본군의 군사작전에 대한 대응책을 논의한 것 같다. 242) 이 모임은, 당시 전남지방의 대표적인 의병장들이 모여 의병부대를 해산할 것인가, 아니면 계속 투쟁할 것인가를 토의한 것으로 추측된다. 심남일은 이 모임 이 있은지 얼마 후에 의병부대를 해산한 듯하다. 그런데 중군장 安贊在는 의병해산에 반대하여 林昌模와 합세하여 끝까지 저항하다가 전사하였 다. 243) 심남일은 姜武景과 함께 일본군의 집요한 추적을 피해 잠복해 있다가 결국 1909년 10월 9일에 모두 체포되었다. 244) 그 이튿날인 10월 10일에 ‘남한폭도대토벌작전’도 일단락되었으며, 245) 그를 체 포한 일본군 제2연대 제3중대는 “전라남도 남부에 있어서 首一이라 칭하는 거괴 심남일 및 그 부하 유수의 수괴 강무경을 포획”한 공로로 상장을 받았다. 246) 일본 측조차 “현재(1908 ; 저자주) 폭도 중에서 가장 교묘한 자” 247) 라고 일컬었으며, 그의 체포는 곧 호남의병의 종식과도 같은 것이었다. 이들은 1908년 초 침체에 빠진 전남지방의 의병을 재건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으며, 아울러 전남에서 활동하는 의병부대간의 연합의진 형성을 주도하였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 심남일 의병부대는 “南一”, 즉 전남 제일의 의병부대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2) 해남 완도의 의병활동 全羅南道는, 특히 1908-1909년 사이에 의병항쟁의 중심지였다. 그렇지만 전 지역에서 의병 봉기가 동시에 있었던 것은 아니다. 처음에는 咸平 羅州 長城 光州 등 주로 內陸지방에서 전개되다가, 248) 그 후 점차 확산되어 1908년 말 1909년 초에는 沿海-島嶼地域에서도 의병이 크게 일어났다. 그리하여 240) 『편책』, 「全南警秘發 제1004호」 ; 『독운사』 14, 581-584쪽. 241) 『편책』, 「全南警秘發 제1271호」 ; 『독운사』 15, 92쪽. 242) 『편책』, 「羅警秘發 제62호」 ; 『독운사』 15, 315쪽. 243) 『편책』, 『독운사』 15, 785-786쪽과 『폭도사』, 140-141쪽 그리고 金正明編, 『朝鮮獨立運動』Ⅰ, 104쪽 참조. 244) 『편책』, 『독운사』 15, 780쪽. 한편 심남일과 강무경은 1910년 6월 3일 광주지방재판소에서 사형을 선고받아 그해 10월 4일에 형이 집행되었다(『朝鮮總督府官報』 第46號<1910.10.21> 참조). 245) 『편책』, 『독운사』 15, 780쪽. 246) 『편책』, 『독운사』 1, 827쪽. 247) 『편집자료』, 『자료집』 3, 558쪽. 248) 『暴徒史』, 146-152쪽에는 1908년 2월부터 10월 사이에 歸順한 의병 116명에 대한 인적 사항, 즉 출신지역·나이·직 업 등이 기록되어 있다. 이들을 출신 지역별로 통계를 내면 아래와 같다. 248) 함평 나주 장성 광주 구례 영광 곡성 장흥 창평 기타 名(116) 27 25 18 11 8 7 6 6 3 5 %(100) 23.3 21.5 15.5 9.5 6.9 6.0 5.2 5.2 2.6 4.3 위의 10대 20대 30대 40대 50대 60대 직업별 농업 상업 기타 명(116) 3 45 34 17 11 6 명(116) 105 10 1 %(100) 2.6 38.8 29.3 14.6 9.5 5.2 %(100) 90.5 8.6 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