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7page

한말의병 245 세째로 반일투쟁활동, 즉 일본세력을 몰아내기 위해 활동하였다. 심남일 의병부대는 먼저 일본군경 이 種痘를 빌미삼아 무고한 한국인을 살해한다는 점을 크게 부각시켰다. 230) 이 점은 심남일 의병부대 가 배일감정을 고조시키고자 주민들의 종두에 대한 편견을 의도적으로 이용한 것 같다. 231) 이와 함께 그들은 일본세력을 몰아내기 위하여 적극적인 무력투쟁을 전개하였다. 심남일 의병부대 의 본격적인 반일투쟁은 1908년 음력 3월부터 다음해 7월까지 이어지고 있다. 이 때가 바로 전라도의 의병활동이 가장 왕성한 시기였다. 232) 이들의 활동지역은 주로 나주 함평 화순 영암 보성 장흥 강진 해남군 등이었다. 이들은 일정한 근거지를 갖지 않고서 나주-강진을 축으로 하는 전라남도의 남부지 역에서 주로 활동하였다. 한편, 심남일 의병부대는 일본 세력에 대항하기 위하여 전투방법의 개선뿐만 아니라 새로운 무기의 확보에도 꾸준히 노력한 것 같다. 이들은 영암이나 장흥 등 주로 해안을 통하여 청국 상인으로부터 무 기를 수입한 듯하다. 233) 또한 이들의 주된 활동지역이면서 그의 출신지이기도 한 함평군에서 의병의 銃改造所가 일제에 발각된 사실 234) 로 보아 이러한 총개조소는 화승총을 뇌관식으로 개조하는 곳으로 짐작된다. 그리고 심남일은 각 의병부대의 독자적인 활동보다는 연대투쟁을 중시하였다. 이를테면, 1908년 봄 안규홍이 의병을 조직하자, 그들과의 합력병진을 요청하였으며, 235) 같은 해 8월에는 전해산과도 그러 한 논의를 진행한 바 있었다. 236) 실제로 1908년 8월 이후에 그는 안규홍 전해산 조경환 의병부대 등과 수시로 연합하며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이러한 성과는 심남일의 적극적인 노력에 의해 이루어진 것 으로 믿어진다. 이처럼 심남일이 여러 의병부대와의 연합을 중시한 까닭은 일본군의 강력한 진압작전 에 효과적으로 대응하여 의병투쟁을 보다 유리하게 이끌기 위함이었다. 237) 이에 대하여 일제는 다양한 형태의 진압작전을 실시하였음은 물론이다. 먼저 1908년 10월에 영산포 헌병분대의 후원 아래 일진회원들로 구성된 정찰대가 발족되어 의병진압을 목적으로 한 정찰을 실시 하였다. 238) 또한 그 해 12월 15일에는 영산포헌병분대장의 지휘아래 8개 부대가, 광주수비대에서는 3 개 부대가 각각 편성되어 의병을 진압하기 위하여 동시에 출동하였다. 239) 그리고 1909년 6월 초에도 3개월 예정으로 3개의 변장정찰대가 활동에 들어갔는데, 그들의 목적은 당시 전라도의 가장 대표적 230) 『편책』, 『독운사』 10, 347쪽과 「제726호」 ; 같은 책, 515-516쪽 참조. 231) 홍영기, 앞의 책, 315쪽. 232) 大韓每日申報 1909년 4월 22일자 「全南義勢」, 7월 13일자 「地方消息」, 황성신문 1909년 7월 11일자 「各地騷擾現 狀」 등 참조. 233) 『統監府文書』 6, 148·304쪽. 234) 황성신문 1908년 2년 5월 10일자 「地方消息一通」. 235) 「副將廉在輔行錄」, 『澹山實記』. 236) 『全海山陣中日記』(戊申年編) 9월 18일자 ; 『자료집』 2, 853-854쪽. 237) 金義煥, 「1909年의 抗日義兵部隊의 抗戰」, 『民族文化論叢』 8(1987), 227쪽. 238) 『편책』, 「羅警秘收 제899-1」 ; 『독운사』 12, 231-236쪽. 239) 『폭도사』, 7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