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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4 민주장정 100년, 광주·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士 보졸 庶士 등으로 구분하였는데, 이들은 10인을 단위로 伍로 편성되었고, 오를 통솔하는 자를 統 將이라 하였다. 한편, 이들은 단일 부대로 주로 활동하였지만, 때로는 여러 개의 의진으로 나누어 활동하였다. 당시 신문에도 이들이 부대를 분리하였다는 기사가 실려 있으며, 222) 의병측 기록에도 “分營”하였다는 내용 이 발견된 점 223) 으로 보아 그러하다. 심남일 의병부대의 분화는 보다 효과적인 대일투쟁의 목적아래 활동지역을 확대하고 세력의 비대화를 방지할 목적으로 추진되었다. 분화의 시기는 1909년 봄을 전 후한 시기였으리라 믿어진다. 예컨대, 자신의 이름으로 격문이나 광고문을 유포한 후군장 노병우, 그 리고 기군장 李德三이 해남 등의 연해지역에서 활동한 사실 224) 로써 그렇게 짐작된다. 그런데 심남일 의병부대는 다소의 학식을 갖춘 유생과 농민 및 상인들에 의해 주도되었고, 대다수의 의병 병사층은 가난한 평민출신으로 보인다. 의병부대의 편제와 직책이 확정되자 심남일은 의병들이 지켜야 할 10개 조항을 고시하였다. 225) 예컨 대, 의병의 지휘체계와 군율을 어긴 자에 대한 처벌 및 각종 민폐를 저지른 자에 대한 처벌을 특히 강 조하였다. 이는, 이들이 특히 주민들의 생명과 재산의 보호에 역점을 두었음을 의미한다. 그래서인지 그는 민폐를 끼치거나 군율을 어긴 자는 가혹하리만큼 엄격히 다스렸다. 226) 일제측 기록에서도 심남 일은 부하의 비행을 엄격히 다스리고, 재물의 강탈을 금지시킨 의병장이라 적고 있다. 227) 심남일 의병부대는 일제의 침략을 저지하여 국권을 회복하는데 그 목적이 있었다. 이들의 의병활 동은 몇 가지 방향으로 나누어 볼 수 있을 것 같다. 첫째로 친일세력을 제거하는 활동이다. 이들은 군 수·세무관 그리고 각 면의 공전영수원들이 세금 거두는 일을 계속한다면 왜적과 같은 종류로 간주할 것이라고 표방하였다. 그는 주민들에게 납세거부투쟁을 유도하였으며, 아울러 대부분 일진회원으로 구성된 자위단과 헌병보조원들도 일본세력과 함께 제거하겠다는 점을 분명히 밝혔다. 228) 둘째로 의병을 빙자한 도적을 퇴치하고자 하였다. 229) 이들은, 의병이라 칭하고서 주민들의 재산을 강탈하는 무리를 義所에 곧바로 알리거나 잡아보내라고 하였다. 이른바 ‘仮 義’의 준동을 막아 주민의 재산을 보호하려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서 의병을 빙자한 도적의 퇴치에 적극적이었던 만큼 자신들의 의병활동에 대한 정당성이 부여되었을 것이고, 나아가 이들은 주민들로부터 한층 신뢰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222) 대한매일신보 1909년 4월 13일자 「남일파 분파」. 223) 「거의일기」, 『남호찬록』. 224) 『편책』, 『독운사』 16, 103-104쪽 및 홍영기, 「舊韓末 全羅南道 島嶼地方 義兵에 대한 一考察」, 『東亞硏究』 21(서 강대 동아연구소, 1990). 225) 「告示軍中文」, ; 『자료집』 2, 571-572 및 「軍門誓約」, 『남호찬록』. 226) 예컨대, 1909년 4월 沈南一은 民弊를 끼친 그의 부하 3명을 죽인 적도 있었다(『編冊』, 『독운사』 14, 116쪽 참조). 227) 『편책』, 『독운사』 1, 806쪽. 228) 『편책』, 『독운사』 10, 515쪽과 『독운사』 11, 400쪽 그리고 『實記』의 「喩土倭文」, 「警喩各處補助員」, 「告示各郡面 長與領員與里長」(『자료집』 2, 915-917쪽) 참조. 229) 『편책』, 『독운사』 11, 40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