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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말의병 241 특히, 김동신 의병부대의 경우, 지리산의 文殊庵을 비롯한 각 사찰을 근거지로 삼아 활동하였다. 숙 영의 편리함이나 활동상 많은 편의를 제공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지역적 연고가 미약한 김동 신으로서는 험준한 산악지대에 위치한 사찰들을 근거지로 삼아 활동하는 것이 더 편리하였을 것이다. 한 겨울의 추위를 넘긴 김동신 의병부대가 활동을 재개하자, 일제는 1908년 1월부터 이들을 진압 하기 위해 진안·남원·광주·구례·진주·하동 등지의 수비대와 경찰 병력을 총동원하였다. 203) 또 한 같은 해 4월에 그들은 이들의 소재를 파악하기 위하여 變裝隊를 투입하기도 하였다. 204) 이들에 대 한 진압작전이 전라도 서부지역에서 활동중인 호남창의회맹소에 대한 진압과 때를 같이하여 이루어 진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일제의 동절기 의병진압 작전은 호남의병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양대 의병부 대를 궤멸시키려는 목적으로 추진된 것이라 하겠다. 그런데 호남창의회맹소는 의병장 기삼연을 비롯 한 200여 명의 의병들이 희생되었다. 이에 반해 김동신 의병부대는 그보다는 피해가 크지 않았던 것 같다. 그것은 이들이 산악지대를 기반삼아 활동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몇 달 후 김동신은 일시 귀향했다가 대전의 순사대에 의해 1908년 6월 6일 체포되고 말았 다. 205) 당시 그는 상당량의 서류를 휴대하고 있었다. 206) 그가 휴대한 다양한 서류 중 대부분의 문서는 김동신과 무주 출신의 兪書記가 작성한 것이었다. 207) 통문이나 왕복문은 우국지사들에게 의병을 권유 하는 내용이었다. 또한 서류 중에는 주민들에게 군자금이나 물자를 징발하는 명령서, 그것을 경감해 달라는 주민들의 청원서, 일제의 군대와 경찰의 동향을 의병에게 알려주는 주민들의 정탐 보고서 등 이 많았다. 208) 이로써 볼 때 의병장 김동신이 단순히 신병을 치료하기 위해 귀향했다고는 보이지 않는 다. 오히려 그가 『문집』에 적었듯이 의병투쟁의 새로운 전기를 모색하기 위해 상경하던 중 불행하게 도 일제의 경찰에 체포된 것이다. 당시 김동신 의병부대는 1908년 1월부터 계속된 일제의 군사작전에 의해 지리산의 근거지를 상실 한 경우가 많았다. 특히, 김동신이 직접 지휘하는 본진의 경우에는 지역적 연고가 취약한 상황이었다. 따라서 이들은 거듭되는 일제의 군사작전에 의해 자신들의 근거지가 자주 노출되었다. 반면에 김동신 과 연합하여 활동하던 의병부대의 경우에는 대체로 지역적 기반을 토대로 활동하였다. 209) 그런 까닭 에 이들은 일제의 군사적 공세를 보다 유리하게 대응한 듯하다. 김동신은 이러한 상황을 극복하는 방 안을 강구하기 위해 상경하던 중 일시 귀향했다가 체포된 것으로 보인다. 203) 『편책』, 「全秘收 제72-2호」·「光秘收 제115호」·「光秘發 제232호」 ; 『독운사』 9, 33-34쪽·222·238쪽 참조. 204) 『편책』, 「大秘收 제678호」 ; 『독운사』 10, 242쪽. 205) 『편책』, 「大警發 秘 제37호」 ; 『독운사』 11, 227쪽. 그런데 김동신은 청나라에 군사원조를 요청하기 위해 서울로 가 던 중 집에 들렀다가 피체된 것으로 적었다(『문집』, 21b-22a쪽). 한편, 그는 체포된 후 재판 과정에서 교수형을 언도받았으나 종신형으로 감형된 후 1910년 9월 초 일제의 사면을 받아 석방되었다(『문집』, 26b·45b쪽 및 『朝鮮 總督府官報』 1910년 9월 5일자 「司法」 참조). 206) 「청취서」, 『독운사』 11, 226쪽. 207) 위의 책, 230-231쪽. 208) 『편책』, 「大警發 秘 제37-1호」 ; 『독운사』 11, 232-233쪽. 209) 문태서 김재성 국인묵 등의 경우에 김동신이 체포된 후에도 계속 활동하고 있음을 일제 군경의 자료에서 확인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