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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말의병 239 라고 있듯이, 그는 기우만 · 고광순과 공모하여 1907년 음력 8월 내장산중의 사찰에서 의병을 일 으켰다. 185) 그후 그는 규합한 의병을 인솔해서 지리산으로 이동하였다. 186) 김동신은 의병부대의 명칭 을 三南倡義所라고 불렀으며, 스스로 三南倡義所都元帥 또는 大韓倡義大將 등을 표방하였다. 187) 김동신 의병부대의 지도부의 직책은 김동신의 『문집』 안에서도 간간히 산견된다. 그것을 종합해보 면 이들의 조직은 선봉-중군-후군 등 전통적인 부대편제인 3군체제로 이루어져 있다. 다만, 지도부 의 구성원 개개인에 대한 구체적인 행적을 파악하기가 쉽지 않다. 그것은 김동신 의병부대가 강력한 결속력이나 지역적 기반 또는 학통을 매개로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으로 보여진다. 삼남창의소라는 명칭에서 알 수 있듯이, 이들은 충청·경상·전라도 등 3道 출신들을 위주로 의병 부대를 구성하였다. 이로 인하여 의병장 김동신은 의병부대의 명칭을 삼남창의소라고 한 것 같다. 그 나마 지도부 가운데 어느 정도 행적을 알 수 있는 이들은 김재성 유종환 염기덕이다. 선봉장 金在性은 金雲老와 동일인으로서 충북 보은 출신인데, 주로 속리산을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188) 그리고 잠시동 안 선봉장을 지낸 兪宗煥은 宣傳官을 지낸 전직 관료였다. 189) 그는 서울출신으로서 충청도를 거쳐 전 라·경상도를 중심으로 활동하다가 1909년 4월에 체포되었다. 그가 김동신 의병부대로부터 독립하 여 의병을 불러모을 때 擬造된 密勅을 사용하였다는 점에서 의병장 김동신과 유사하다. 또한 중군장 으로 활약한 염기덕은 양반으로서 충남 정산의 칠갑산에서 의병장에 추대되었으나 심상희 의진에 합 류하여 활동하였다. 그후 다시 김동신 의병부대의 지도부로 활동하다가 김동신이 체포되자 독자적으 로 의병활동을 전개하던 중 1909년 4월에 체포되었다. 수성장과 군량장을 각각 맡아 활동하던 정기 중과 임대형은 양반 신분이었다는 사실 정도가 확인될 뿐이다. 190) 여타의 다른 직책을 가진 김동신 의 병부대의 지도부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진 바가 없다. 당시 이들은 투쟁역량이 낮은데다 軍紀마저 확립되지 않았다. 이는, 이들을 결속시켜주는 학문적 동 질성이나 지역적·혈연적 기반 등이 견고하지 않았던 것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또한 이들이 단 일한 의병부대라기 보다는 여러 의병부대의 연합 형태였기 때문에 결속력이 낮았으리라 짐작된다. 이 에 의병장 김동신은 투쟁역량을 강화하기 위한 방법을 모색하였다. 191) 그는 전라도로 이동한 강원도 해산군인들을 받아들여 전력을 보강하였다. 192) 김동신 의병부대의 의병항쟁은 전라도에서 시작되었다. 193) 1907년 9월 김동신 의병부대는 순창 우 185) 홍영기, 앞의 책, 271쪽의 각주 137 참조. 186) 『문집』, 7쪽 및 고광순, 『鹿川遺稿』 下, 「行狀」 그리고 『편책』, 『독운사』 15, 754쪽 참조. 187) 『편책』, 『독운사』 14, 44·50쪽 및 『한말의병전쟁자료집--暴徒檄文』(도서출판 선인, 2000), 34·123쪽 참조. 188) 『편집자료』, 『자료집』 3, 537쪽. 189) 『편책』, 「義兵將兪宗煥被擒顚末」 ; 『독운사』 1, 775-776쪽 및 『독운사』 14, 335-339 쪽 참조. 190) 『문집』, 13b쪽. 191) 위의 책, 15쪽. 192) 1907-8년을 전후하여 강원도의 상당수 해산군인들이 전라도에서 의병으로 활동하였는데, 이들을 받아들였을 가능 성이 높다. 특히, 김동신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던 정일국의 휘하에 원주진위대 김동성 등 200여 명이 합류했다는 점 으로 보아 그러하다(『편책』, 『독운사』 15, 755쪽. 193) 『편집자료』, 『자료집』 3, 54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