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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말의병 237 곡사를 근거지삼아 일제의 군경을 맞아 싸웠다. 173) 격렬한 전투로 인해 사태가 긴박하게 돌아가자 의 병장 고광순은 좌우에 말하기를 “한번 죽음으로 국가에 보답하는 것으로 내 마음은 이미 정해져 있 다. 너희는 나를 염려하지 말고 각자 도모하라”라고 하였다. 이에 고제량은, “처음에 의로서 함께 일 어났으며 마지막에도 의로서 함께 죽는 것인데 어찌 죽음에 임하여 홀로 면하겠는가”라고 말하며 끝 까지 싸우다가 순국하였다. 이 전투에서 고광순 이하 25명의 의병이 죽고 다수가 부상하였다. 일제는 전투가 종료된 후에 연곡사와 문수암을 소각한 후 철수하였다. 174) 이 사찰들이 의병부대의 거점으로 이용되었기 때문이다. 이로써 고광순 의병부대의 활동은 종식되었다. 하지만 피아골에서 살아남은 고씨 일가, 즉 ‘軍簿’를 들고 피신한 고광순의 막내동생 광훈, 그리고 집안의 동생 광문과 광수 등이 흩어진 병사들을 수습하여 의병투쟁을 계속하였다. 이들은 지리산 주 변의 구례 남원 곡성 그리고 무등산 일대를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이와 같이 고광순은 1896년초 호남의병이 봉기한 이래 지속적으로 장기간 항쟁을 주도해왔다. 그리 하여 고광순 의병부대는 전라도가 한말의병의 주무대가 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장성 나주 담양 지 역에서 불을 지핀 한말의 의병항쟁은 전라도 전체로 확산됨으로써 1908-9년에 이르러 한말 의병전 쟁을 전남지역에서 주도하게 된 것이다. 무엇보다 의병장 고광순은 지리산을 장기항전의 근거지로 만 들기 위해 장기항전의 전략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더욱 주목된다고 하겠다. 당시 구례에 살고 있던 매천 황현은 그의 죽음을 다음과 같이 애도하였다. 연곡의 수많은 봉우리 울창하기 그지없네 나라 위해 한평생 싸우다 목숨을 바쳤도다 전장터의 말들은 흩어져 논두렁에 누웠고 까마귀 떼만이 나무 그늘에 날아와 앉아 있네 나같이 글만 아는 선비 무엇에 쓸 것인가 이름난 가문의 명성 따를 길 없다네 홀로 서풍을 향해 뜨거운 눈물 흘리니 새로 쓴 무덤이 국화 옆에 우뚝 솟았음이라 (2) 金東臣 의병부대 호남의병의 선구자로 알려진 김동신은 충남 회덕 출신의 韓醫였다. 175) 당시 호남에서 봉기한 대표적 173) 『녹천유고』, 「行狀」 참조. 174) 위와 같음 및 「三義士行狀」, 『자료집』 3, 287·296쪽. 175) 『편책』, 「義兵將 金東臣 逮捕 및 聽取書」(이하 「聽取書」) ; 『독운사』 11(1982), 227쪽 및 『편책』(국가기록원 소장, 경무 88-26, 1908), 0743쪽 참조. 한편 한의였다가 의병을 일으킨 또 다른 인물로는 서병희를 들 수 있다. 그는 고 향인 경남 양산에서 의업에 종사하다가 1907년 음 10월 허위의진에 참여하였다(『편책』, 「義兵將徐炳熙被告狀況」 ; 『독운사』 1, 1965 ; 같은 책 16, 318쪽). 이로써 보건대 한의와 같은 직종의 종사자들도 일본의 침략을 심각하게 인식한 일면을 읽을 수 있다.